본관은 순천(順天). 견훤(甄萱)의 사위이다. 견훤을 좇아 후백제 건설과 발전에 공훈을 세웠다.
935년(후백제 견훤 44) 3월 신검(神劒)이 반역하여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이어 6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에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936년(태조 19) 9월 아내와 비밀히 상의한 뒤 고려에 사자를 보내어 귀순 의사를 밝히고 왕건(王建)이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다면 내응하여 고려군을 맞이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왕건은 크게 기뻐하여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내면서 장래를 약속하는 금석지약(金石之約)으로 후일을 기약하였다. 9월에 왕건이 마침내 후백제를 칠 때 내응하여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왕건은 박영규의 공을 높이 치하하여 좌승(左丞)을 제수하고 밭 1,000경(頃)을 내려주었다. 이어서 역마 35필로 박영규의 부인을 맞이하게 하고 박영규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뒤에 관직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박영규의 세 딸이 왕건의 부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3대 정종(定宗)의 후비인 문공왕후(文恭王后)·문성왕후(文成王后)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