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창(軍資倉)은 조선시대에 군량을 마련하고 운영을 담당하는 기구인 군자감(軍資監) 소속의 창고로서, 1413년(태종 13)에 설치되었으며 군자고(軍資庫), 군자강감(軍資江監)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본래 군자감 소속의 창고로는 도성 내부인 광통교(廣通橋) 인근의 군자본감(軍資本監), 송현(松峴)에 위치한 분감(分監)이 있었다. 하지만 1410년(태종 10)을 전후하여 남한강 수로를 통한 경상도의 세곡 운송이 정비되면서 군자감에 상납되는 미곡의 양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1413년(태종 13)에 용산강 일대에 84칸 규모의 군자창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조선 개국 초 군자창에서는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된 군자전(軍資田) 혹은 군자위전(軍資位田)이라는 토지에서 수취한 세곡(稅穀)을 조운(漕運)을 통해 운송하는 방식으로 비축곡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세종 대 이후 공법(貢法)과 국용전제(國用田制)를 골자로 하는 재정 운영의 개편이 이뤄짐에 따라서 군자창을 비롯한 군자감의 비축곡 마련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군자창을 비롯한 군자감에서는 전국의 전세 상납액 중 풍저창(豐儲倉)과 광흥창(廣興倉)에 납부되는 이외의 세액을 비축하는 방식으로 비축곡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이전 시기보다 군자창의 비축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각 기관의 위전(位田)들이 모두 국용전(國用田)으로 통합되고 재정의 중앙집권화가 제고됨에 따라 이전 시기에 소속 위전(位田)의 소출이 부족한 기관에서 군자창을 비롯한 군자감의 비축곡을 대출하던 관례가 사라졌다. 이를 통해 비축곡의 유출이 크게 감소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 전기 군자창에 비축된 양곡(糧穀)은 대체로 50만 석 정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비축량은 16세기 후반인 명종 · 선조 때에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이것은 계속된 흉년과 기근으로 중앙의 군자곡(軍資穀)이 종자로 활용되거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곡(賑恤穀)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568년(선조 1)에 중앙의 비축량은 10만 석이 채 못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량미 비축의 중요성이 재고되었다. 이에 서강의 본창 이외에 1596년에는 용산(龍山)에 별영(別營)을 설치해 훈련도감의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였다. 또, 1640년(인조 18)에는 따로 별고(別庫)를 설치하여, 호조(戶曹)에서 관리하는 공가(貢價)와 잡직 관원의 급료를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