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원(汝元). 권결(權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부승지 권확(權鑊)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좌윤 권우(權堣)이며, 어머니는 제조 서경주(徐景霌)의 딸이다. 진사 권후(權垕)에게 입양되었다.
1669년(현종 10) 진사가 되고 같은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3년 10월, 승문원의 정언·지평을 거쳐 사헌부집의·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원현감이 되었다.
현감 재직중에는 재결(裁決)을 신속히 하여 관아에 체송(滯訟: 소송이 미해결로 정체됨)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서 부수찬이 되어 경연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문의(文義)를 조리있게 분석하여 명석한 식견을 널리 알렸다.
1683년(숙종 9) 교리가 되어 더욱 직분에 충실하는 동안, 영부사 송시열(宋時烈)이 태조의 존호(尊號)에 정륜소의(正倫昭義)를 가상(加上)함으로써 위화도회군의 위업을 현창(顯彰)하자는 소를 올린 일이 있다.
이 때 송시열의 주장에 반대하였는데, 송시열이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자, 마침내 신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교외로 나가 은거하였다. 최석정(崔錫鼎)이 묘갈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