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安東) 출생. 1910년부터 안동교회에서 선교사의 부인에게 풍금과 피아노를 배우며 서양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일본고등음악학교(나카노〔中野〕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전공은 성악이었고, 성역은 테너였다.
재학 중인 1927년, 도쿄에서 열린 ‘베토벤 100년제’에 곡중 독창자로 뽑혔고, 이어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개최된 음악회에 출연하여 명성을 확고히 하였다. 1928년 일시 귀국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구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어 서울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가진 독창회에서는 처음으로 슈베르트 등의 독일 가곡을 소개하는 한편, 봄나들이, 눈·꽃·새 등 동요도 작곡하였다.
1930년 졸업 후 도쿄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성공한 이래 일본 각지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1930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음악교수로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광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겼다. 1939년 일본고등음악학교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교수로 초빙될 때까지 경성방송국에서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하였으며 평양음악협회를 주도하는 한편 평양음악연구소를 개설, 후진 양성에 힘썼다. 국내와 일본, 만주 곳곳에서 수많은 독창회를 개최하였으며, 처음으로 우리말로 된 찬송가를 빅터 레코드사에서 취입하였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고 변절하지 않았다.
1944년 귀국하였고, 광복이 되자 경주예술학교와 대구음악학원을 세우고 『국민가요집』을 펴내는 등 활동을 하였으나 당시 미군정이라는 혼란한 시국에서 여의치 못하였다. 한국전쟁 때에는「승리의 노래」등 군가를 작곡하였고, 이후 합창단을 조직하여 국민개창운동에 힘썼다. 노년에는 고향 안동에서 음악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평생 순수한 음악적 열정과 민족정신으로 일관하였다. 1956년 제1회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는 작곡집『국민가요집』외 「봄나들이」·「눈·꽃·새」·「대한아기행진곡」·「사향가(思鄕歌)」·「봄 오는 소리」·「결혼축하의 노래」·「백합」·「승리의 노래」 등이 있다. 총 200여회의 독창회를 가졌으며, 국내에 처음으로 독일 가곡을 소개한 성악가로 서양음악 수입 후 우리나라 초기의 성악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