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은 충청도 청양 출신의 유생으로 홍주향교 전교가 되어 향약을 베푸는 등 향리의 교화에 힘썼으며, 부친인 안창식과 함께 1895년 홍주의병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다.
을사조약의 늑결 이후에는 민종식·채광묵 등과 함께 1906년 3월 홍주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는 국망 후에는 1912년 독립의군부의 충남대표로, 3·1운동시에는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등 대일항쟁을 계속하였다. ≪규당일기≫에는 홍주을미의병의 조직과정과 초기의 활동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안병찬이 을미사변에 분개하여 관찰사에게 거의를 권유한 일과 관찰사의 거절에 채광묵(蔡光默) 등과 향회를 실시하고 군사를 모아 거의하여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홍주의병을 일으킨 사실과 관찰사의 변심으로 체포된 그가 홍주감옥에서 자결을 시도한 일도 기록되어 있다.
서울 감옥으로 이송되어 1896년 2월 25일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기까지 면회자와의 대화내용이나 시를 읊어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던 감옥 안에서의 정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진술한 공사(供辭) 내용과 판결선고서,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홍주의병장들을 조속히 석방할 것을 건의한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