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초창기부터 기록 성격의 영화와 극적 성격을 띤 허구성을 지닌 영화라는 두 개의 갈래로 발전하여 왔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후자의 경향을 띤 허구영화를 극영화라고 말한다. 즉, 극영화란 멜로드라마 영화 · 희극영화 · 사극영화 · 스릴러영화 · 액션영화 · 전쟁영화 등 영화의 모든 형태를 포용하는 포괄적인 영화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영화의 기점으로 이야기되는 김도산(金陶山) 각본 · 감독의 <의리적구투 義理的仇鬪>(1919년)는 극적 성격을 띠는 영화라고 할 수 있으나, 영화와 연극을 연결해서 만든 연쇄극(한 무대에서 實演과 영화를 섞어 줄거리를 이끌어 가며 상연하는 극)이라는 점에서 극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극적 줄거리가 있는 영화로서 최초의 극영화는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윤백남(尹白南)의 <월하의 맹서>(1923년)라고 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는 우리 나라 극영화의 주류를 이룬다. 멜로드라마라는 말은 통속적 비극을 의미하는데 초창기 영화인 왕필렬(王必烈)의 <해(海)의 비곡(悲曲)>(1924년), 이규설(李圭卨)의 <농중조 籠中鳥>(1926년), 이경손(李慶孫)의 <장한몽 長恨夢>(1926년) 등은 일본의 신파조(新派調) 무대의 각색이라는 데서 자연히 멜로드라마 성격을 띠었다.
이광수(李光洙)의 소설을 각색, 이경손이 감독한 <개척자 開拓者>, 자신의 소설을 각색, 감독한 심훈(沈薰)의 <먼동이 틀 때> 등이 소박한 이상주의나 계몽주의적 내용을 갖고 있지만 극적 뼈대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사극영화로 분류되는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도 멜로드라마적 골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나라 사람의 의식구조는 멜로드라마 취향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월하(月下)의 맹서(盟誓)>가 만들어진 이래 오늘날까지 수백 편의 멜로드라마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그 가운데 대표 작품은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1926년) · <옥녀 玉女>(1928년) · <오몽녀 五夢女>(1936년), 이구영(李龜永)의 <낙화유수>(1927년) · <승방비곡>(1930년), 안종화(安鐘和)의 <노래하는 시절>(1930년), 이규환(李圭煥)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년) · <나그네>(1937년) 등이 있다.
또한 김유영(金幽永)의 <애련송 愛戀頌>(1939년) · <수선화>(1940년), 신경균(申敬均)의 <순정해협 純情海峽>(1937년), 최인규(崔寅圭)의 <수업료>(1940년) · <파시 波市>(1949년), 신상옥(申相玉)의 <악야 惡夜>(1952년) ·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년), 홍성기(洪性麒)의 <여성일기>(1949년), 이강천(李康天)의 <피아골>(1955년), 한형모(韓瀅模)의 <자유부인>(1956년), 이용민(李庸民)의 <산유화> 등도 인기를 끈 작품이다.
김기영(金綺泳)의 <황혼열차>(1957년) · <초설 初雪>(1958년), 유현목(兪賢穆)의 <교차로 交叉路>(1956년) · <오발탄>(1961년), 조긍하(趙肯夏)의 <육체의 길>(1959년), 박종호(朴宗浩)의 <비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년), 김수용(金洙容)의 <화려한 외출>(1977년), 이만희(李晩熙)의 <만추 晩秋>(1966년), 강대진(姜大榛)의 <마부>(1961년), 정소영(鄭素影)의 <미워도 다시 한번>(1968년), 최하원(崔夏園)의 <독짓는 늙은이>(1968년), 김호선(金鎬善)의 <겨울 여자>(1977년), 이장호(李長鎬)의 <별들의 고향>(1974년) ·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 배창호(裵昶浩)의 <깊고 푸른 밤>(1984년) 등도 있다.
여기에 소개된 영화는 예술적 측면에서 또는 흥행적인 측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들이고 이 밖에도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아리랑> · <임자없는 나룻배> · <파시> ·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초설> · <만추> · <화려한 외출> 등은 사실주의 감각과 영상미를 지녀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멜로드라마 영화는 양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우리 나라 영화를 대표하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이어 대표적인 형태는 사극영화이다. 무성영화시대 초창기부터 일반 관객들이 줄거리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춘향전> · <심청전> 등의 고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극영화의 형태에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 사실(史實)이 아닌 고전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를 포함시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현대가 아닌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허구적 이야기를 담은 경우도 사극영화라 하는 것이 관례이다.
대표 작품은 일본인 하야카와(早川孤丹)의 <춘향전>(1923년), 박정현(朴晶鉉)의 <장화홍련전>(1924년), 김조성(金肇聲)의 <흥보전>(1925년), 윤백남의 <운영전 雲英傳>(1925년), 이경손의 <심청전>(1925년) · <숙영낭자전>(1928년), 이금룡(李錦龍)의 <박문수전 朴文秀傳>(1930년), 나운규의 <개화당이문 開化黨異聞>(1932년), 이명우(李明雨)의 <춘향전>(1935년), 홍개명(洪開明)의 <장화홍련전>(1936년), 전창근(全昌根)의 <단종애사>(1956년) 등이다.
또한 신상옥의 <연산군>(1961년) · <성춘향> · <대원군>(1968년), 안현철(安賢哲)의 <세종대왕>(1964년), 최인현(崔寅鉉)의 <양반전>(1966년) · <태조왕건>(1970년) 등이 있다.
사극영화의 제작 편수가 많지 않은 것은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사극물이 많이 다루어짐으로써 상대적으로 사극영화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감독에 따라 사극영화에 집념을 보이는데 신상옥 같은 경우이다.
최초의 희극영화는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노수현(魯壽鉉)의 만화를 영화화한 이필우(李弼羽)의 <멍텅구리>(1926년)이다. 일제 통치하에서 희극영화는 거의 나오지 않았으나 광복과 6·25전쟁을 거친 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에 만들어진 주요 희극영화는 이병일(李炳逸)의 <시집가는 날>(1956년), 유현목의 <인생차압>(1958년), 권영순(權寧純)의 <5부자>(1958년), 이봉래(李奉來)의 <마이동풍>(1961년), 이형표(李亨杓)의 <서울의 지붕밑>(1961년), 조긍하의 <인간만세>(1962년), 전홍식(全洪植)의 <특등신부와 삼등신랑>(1962년), 전응주(全應柱)의 <와룡선생 상경기>(1962년) 등이 있다.
그러나 일제 통치하에서는 비평과 풍자정신이 피어나지 못했듯이, 광복 뒤에도 경직된 정치풍토와 풍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적 풍토로 진정한 의미의 희극영화는 발달하지 못하고 저속한 소극(笑劇:익살과 웃음거리를 주로 하여 관객을 웃기는 연극) 영화로 타락해갔다. 그러나 오영진(吳泳鎭) · 이봉래 · 이형표 등 희극정신을 지닌 감독의 출현은 소중한 수확이다.
활극물(活劇物) 또는 액션영화로 불리는 활극영화는 우리 영화의 초창기인 연쇄극시대(連鎖劇時代)부터 하나의 중요한 영화 형태가 되어왔다. 1919년 김도산이 만든 우리 나라 최초의 연쇄극영화 <의리적구투>도 활극영화에 속하며 이어서 나온 김도산의 <시우정 是友情>(1919년) · <의적 義賊>(1920년), 임성구(林聖九)의 <학생절의 學生節義> 등의 연쇄극영화가 이에 속한다.
그 뒤로는 나운규의 <풍운아 風雲兒>(1926년) · <들쥐>(1927년) · <사랑을 찾아서>(1928년) · <철인도 鐵人都>(1930년) · <금강한 金剛恨>(1931년) 등의 작품이 있다.
영화는 활동사진이라는 표현이 말하여주듯이 움직임이 중요시되었으며, 특히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장면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의 광활한 서부를 무대로 한 ‘서부활극’이 강한 오락성으로 세계의 관객을 정복한 것이다. 우리 나라 영화에서도 이러한 활극 요소를 살릴 수 있는 형태가 오락영화로서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으며 ‘스릴러영화’ · ‘전쟁영화’ · ‘무술영화’라는 형태로 발전하면서 액션영화의 재미를 추구하였다.
흔히 괴기영화 · 추리영화 · 범죄영화로 불리는 영화가 이 형태에 속하며 활극 요소가 강하다. 최초의 스릴러영화로는 김수로(金壽魯)의 <괴인의 정체>(1927년)를 들 수 있는데, 1950년대 후반에 제작 편수가 늘어나면서 하나의 영화 형태로 자리잡았다.
주요한 작품으로는 한형모의 <마인 魔人>(1956년), 정창화의 <진주탑>(1960년), 이봉래의 <백주의 암흑>(1960년), 김기영의 <하녀>(1960년), 이만희의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년), 이성구(李星究)의 <장군의 수염>(1963년) 등이 있다. 스릴러영화는 오락 성향이 강하지만 그 가운데 영화의 재미를 살리면서 영상예술의 수준을 높인 작품으로 김기영의 <하녀>,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을 들 수 있다.
6·25전쟁의 체험이 우리 영화에도 반영되어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1950년대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만희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 신상옥의 <빨간 마후라>(1964년) 등은 잘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이밖에 1960년대 후반부터 영화관객의 연령층이 젊어짐에 따라 청춘영화가 많이 나왔고, 1970년대에 태권도 붐과 홍콩 무술영화의 영향을 받은 무술영화가 오락적 재미를 추구하며 많이 나왔다.
김수용의 <청춘교실>(1963년), 정진우(鄭鎭宇)의 <배신 背信>(1964년) · <초우 草雨>(1966년) 등은 청춘영화의 우수작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