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회령 출신.
회령보통학교를 나와 회령신흥보통학교 고등과에 진학하였는데, 이때 이 학교로 편입해 온 나운규(羅雲奎)를 만나게 되었다. 몇 해 뒤 나운규는 항일사건으로 회령을 떠나 북간도로 갔고, 윤봉춘은 태극기사건으로 청진형무소로 수감되었다.
그 뒤 윤봉춘이 북간도 명동중학(明東中學)에 입학하였을 때 여기에서 또다시 나운규와 재회하였다. 그가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운규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나운규가 그의 작품 <들쥐>(1929)에 윤봉춘을 연기자로 데뷔시켰기 때문이다.
<잘있거라>(1927)·<옥녀 玉女>(1928)·<사랑을 찾아서>(1928)·<사나이>(1928)·<벙어리 삼룡(三龍)>(1929) 등의 나운규의 영화에 계속 출연함으로써 연기자로서의 자리를 굳혔고, 그 뒤에도 이구영(李龜永)의 <승방비곡 僧房悲曲>(1930), 그리고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 五夢女>(1937)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연기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1930년에는 <도적놈>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큰무덤>(1931)·<도생록 圖生錄>(1938)·<신개지 新開地>(1942) 등을 일제하에서 만들었는데, 그 작품들에는 그의 민족주의자로서의 자유사상이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일제의 어용영화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朝鮮映畫人協會)의 가입을 거부하고 낙향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영화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1945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에 20여 편에 가까운 작품을 연출하였다.
광복 직후 1940년대 후반의 작품들은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광복영화(光復映畫)’라고 할 수 있는데, <윤봉길의사 尹奉吉義士>(1947)·<3·1혁명기 三一革命記>(1947)·<유관순 柳寬順>(1948)·<백범국민장실기 白凡國民葬實記>(1949)·<애국자의 아들>(1949) 등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1960년대에는 민족의식을 담은 사극을 많이 만들었는데, <처녀별>(1956)·<논개 論介>(1956)·<한말풍운 韓末風雲>과 <민충정공 閔忠正公>(1959)·<황진이(黃眞伊)의 일생>(1961)·<여인천하 女人天下>(1962)·<애정삼백년>(1963)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고향의 노래>(1954)·<다정도 병이런가>(1957)·<영원한 내사랑>(1958)·<승방비곡>(1958)·<인생대학 일년생>(1959) 등은 당시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