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영근(永根). 서울 충무로 초동에서 태어나 상동(尙洞) 예배당 안에 있던 상동학교를 나왔으며, 일찍이 연극에 뜻을 두어 신극운동의 선구자인 이인직(李人稙) 밑에서 신극에 참여하였다. 이인직의 원각사(圓覺社)가 폐관되자 1911년 혁신단(革新團)과 유일단(唯一團)을 거쳐 신극좌(新劇座)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신극좌의 단원들 중 이름을 떨치던 배우들이 다시 이기세(李基世)의 문예단(文藝團)으로 돌아가 버리고 대부분 신인들만 남게 되어 운영이 부진하게 되자, 당시 단성사의 주인이던 박승필(朴承弼)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활동사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를 만들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이 연쇄극은 1918년 황금좌(黃金座)의 창립2주년 기념공연을 위하여 일본에서 초청되어온 세토나이카이극단(瀨戶內海劇團)의 「선장의 처」를 보고 시도한 것이다. 김도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이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이후에도 몇 편의 연쇄극과 기록영화를 만든 뒤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1922년 초겨울 「국경」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다가 자동차사고로 부상을 입고 투병 중에 사망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작품으로는 1919년「의리적 구투」·「시우정(是友情)」·「형사고심(刑事苦心)」·「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경성교외전경(京城郊外全景)」, 1920년「의적(義賊)」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