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활자본. 1896년 1월부터 같은 해 3월초까지 유생들을 중심으로 일어 난 의병 봉기에서 해산까지를 날짜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의진과 주고받은 통문·창의문·제문·소 등도 수록하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기우만(奇宇萬)이 전국의 우국지사들에게 보낸 통문과 창의문이 있어 그의 위정척사사상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에 따른 국수 보복과 그 해 11월에 있었던 단발령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다음해인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에 대한 국민의 슬픔을 토로하는 한편, 개화는 인륜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내용의 글을 지어 전국 각지에 배포해서 의병의 궐기를 종용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 밖에도 1896년 1월에 기우만이 보낸 통문을 보고, 그 해 2월 4일 이학상(李鶴相)을 필두로 1백여 명이 답서(答書)에 연명한 사실, 이들 연명 자가 2월 8일에 참서관 안종수(安宗洙)를 성토한 일, 9일 성중(城中)의 백성과 아전·군교(軍校) 등이 안종수를 살해하고 10일 연리청(椽吏廳)에 창의소를 설치하여 의진의 부서를 배정한 일, 11일에 기우만이 의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장성으로부터 와서 나주 의병장 이학상과 만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제문 2편이 실려 있고, 1896년 2월 20일에 이병수와 기우만이 지은 소가 기록되어 있다. 소의 내용은 내각수반이던 김홍집(金弘集)과 정병하(鄭秉夏)가 법에 의해 처형되고, 친일 관리인 참서관 안종수가 살해된 것은 당연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에 덧붙여서 김홍집·정병하·안종수 등이 처형되고 난 뒤의 국민의 반응을 상세하게 피력하였으며,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다. 1896년 2월 22일에는 이병수가 통문을 지어 담양·창평·순창·장성·광주 등의 다섯 고을에 발송하였고, 2월 26일 이후로 점차 의병이 해산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병수의 문인인 고광칠이 소장하고 있다.
책은 한말 을미의병 당시 호남의병진의 의병활동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