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목활자본. 권인규(權仁奎)가 예안통문(禮安通文)에 대답한 글과 의병장 민용호(閔龍鎬)에게 보낸 글 등 모두 8통의 창의(倡義) 관계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두에 답예안창의통문(答禮安倡義通文) 1편과 권말에 서고문(誓告文) 1편, 그리고 그 사이에 창의문과 서한 등 6통이 실려 있다. 권두에 실린 <답예안창의통문>은 1895년(고종 32) 12월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궐기문에 답한 글이다.
전기 의병[을미의병] 당시에 발문(發文)한 6통의 창의문 중 <창의포고문>은 1896년 영남·영서·영동지방 뿐 아니라 각지에서도 거병할 것을 종용하기 위해 띄운 글이다. <여의병장민용호서 與義兵將閔龍鎬書>는 1896년 정월 영동구군도창의소(嶺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고 관동지방에서 의병항쟁의 기세를 드높이던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격려문이다.
<창의통문>은 1896년 초 관서·관북지방에서의 거병을 촉구해 보낸 글이다. <여유진장이병채 與留陣將李秉埰>는 1896년 2월 이병채의 의병진이 실패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격려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관동창의소포유문 關東倡義所布諭文>은 의병장 민용호 등이 심경을 피력해 관동지방의 선비와 대소 인민에게 포유한 글이다. <관동창의사효유문 關東倡義士曉諭文>은 경군(京軍)과 각 항구의 통상관(通商館)에서 일본군에 붙어서 생활하는 자를 타일러 깨우치고자 한 글이다.
권인규는 을미의병 때 의병 봉기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아들 종해도 을사의병 이래 활약하다가 패하였다. 변명·변장으로 겨우 화를 면했는데 종해의 어머니와 장자 기수(基洙), 차남 증수(曾洙) 역시 구사일생으로 화를 모면하였다. 한말의병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권종해의 손자인 영일이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