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내용은 창의소(倡義疏) 1편,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 1편, 의소(擬疏) 2편이 실려 있다.
<창의소>에는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그해 10월 단발령이 실시되자 다음해 1월 고향 안의(安義 :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동향인 서재기(徐再起)·정도현(鄭道鉉)·박준필(朴準弼) 등과 더불어 기의(起義)하여 진주성에 잠입하고 매국노 관리를 처형하는 등의 의병항쟁을 벌이던 의병장 노응규가 군왕(君王)에게 상소한 글이다.
이 소장(疏狀)에서 그는 창의가 불가피함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이어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하여 임금을 위하여 새로운 결의로 난국타개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다음 <지부자현소>는 진주창의(晉州倡義) 이후 상경한 노응규가 1897년 10월 판서 신기선(申箕善)의 주선과 조병식(趙秉式)의 입품(入稟)으로 자신이 직접 도끼를 등에 지고 궐내에 들어가 상소를 한 것이다.
그 내용은 옛날 한나라의 관동(關東)과 당나라의 하북(河北)에서 의사(義士)들이 일어나 동탁(董卓)과 안녹산(安祿山)을 무찌르던 예를 들어 조국의 운명을 개탄하였는데, 위의 <창의소>가 고종에게 상달되지 못한 반면 <지부자현소>는 고종으로부터 비답을 받기에 이른 글이다.
나머지 2편의 의소는 지부소(持斧疏)와 같은 시기에 지은 초고본 의소 1편과 소 1편으로 그 내용은 그가 국모시해사건 이래 분함을 씻을 것을 맹세하고 또 군왕에게 무비증강(武備增强)을 피눈물로 호소한 글들이다. 이 책은 의병장 노응규의 연구자료는 물론 한말의병연구에 있어서도 값진 자료이다. 원본은 노응규의 족손 재일이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