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김인준(金仁俊). 평안북도 선천 출신.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하고 22세 때 만주 철령육영학당(鐵嶺育英學堂)에서 수학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 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갔다.
1919년 6월 김시황(金時晄)·김동식(金東植)·백운기(白雲起) 등이 의주에서 무장독립단체인 대한독립보합단(大韓獨立普合團)을 조직하자 이에 입단하여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다.
이해 10월 철산에 사는 정덕인(鄭德仁)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박초식(朴初植)·이광세(李光世) 등과 함께 최형렬(崔亨烈)·전석원(田錫元)·전윤영(田允永)·정창학(鄭昌學) 등으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0년 10월 무장계획단원인 조상백(曺相伯)과 제휴하여 군자금 모금을 결의하고, 김동식으로부터 무기를 지급받고, 이광세와 같이 상경하여 무장계획 책임자인 이종영(李鍾榮)을 만나 군자금 모금계획을 협의하였다.
모금 대상자를 운니동에 사는 부호 변석연(邊錫淵)으로 정하고 3만원의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이때 변석연의 맏아들 변덕영(邊德永)의 밀고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재판과정에서 보합단의 정체가 밝혀져 이광세를 비롯한 30여 단원이 붙잡히고 백운기 등 세 단원은 항전하다 전사하였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1923년 4월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