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 21cm, 가로 32cm. 필사본. 백두산은 조선의 조산(祖山)으로 일찍부터 신성하게 여겨졌고 청나라도 만주 지역에서 건국하였기 때문에 만주를 성역화하고 백두산을 중히 여겼다.
그런데 백두산 산삼 채취를 둘러싸고 양 국민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범경사가 자주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 양국 간에 외교 문제로 비화되자, 두 나라는 국경을 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나라는 1712년에 목극등을 파견하여 국경 교섭을 요구해왔다. 조정에서는 접반사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를 파견하여 국경 회담에 임하게 되었다.
이 때 목극등이 소지했던 지도를 뒤에 모사하여 우리 나라에 모사본을 주었다. 이 지도 오른 쪽에는 “康熙五十一年我肅宗三十八年壬辰穆胡克登定界時所模(강희51년아숙종38년임진목호극등정 계시소모)”라고 한자로 쓰여있고 박권 정계사가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목극등 일행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기 위하여 탐사하였던 지역을 자세히 표기하였다. 이들은 혜산을 출발하여 오시천을 거쳐 서수라덕에 도착하였고, 화덕과 지당을 지나 박봉곶에 도착하여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압록강원을 조사하였고, 백두산 천지에 이르러 이를 조사하고 다시 내려와 분수령상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비는 토문강원비(土門江原碑)로 되어 있고 비석도 그려져 있다. 이들은 토문강을 여러모로 조사하였는데, 토문강이 곧 물줄기가 끊어지고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곳을 입지암류(入地暗流)라고 적고 있다.
이들은 제1파가 땅속으로 잦아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제2파가 시작되고 있음도 조사하였으며, 노은동 산쪽을 거쳐 대흥단수도 조사하고 어윤강(漁潤江)에서 우리측 접반사와 만나 박하천을 지나 무산부(茂山府)에 도착하였다. 지도에는 백두산 천지도 크게 그려져 있으며 천지에서 세 줄기의 강이 시작하고 있음을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압록강과 송화강과 토문강이다.
정계비를 세운 뒤 목극등은 이 지도를 필사하여 우리 나라에 주고 갔는데, 그 지도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에는 이 지도 외에 백두산정계비도가 3종이 있는데, 두 지도는 정계비를 설치한 뒤 경계가 불확실한 지역에 돌이나 나무 등으로 경계를 명확하게 표시한 상황을 표기한 지도이다.
또 하나의 다른 지도는 1887년(고종 24)에 이중하(李重夏)가 감계사(勘界使)가 되어 청나라 감계사 덕옥(德玉) 등과 국경지역을 조사한 내용을 표기한 지도이다. 이상의 4종 백두산정계비도는 모두 규장각도서에 있다. →백두산정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