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곤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광복단 국내파견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2년(고종 29)
사망 연도
1922년 7월 8일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정의
일제강점기 때, 광복단 국내파견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20년 7월 의주에서 광복단 결사대원 김진하(金振河)·주상옥(朱尙玉)으로부터 가입권유를 받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8월 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과 함께 광복단에 가입하고 평안북도 지단장 신문약(申文若)과 참리부장(參理部長) 조병봉(趙秉鳳)을 만나 경무원(警務員)이 되었다.

9월에는 국내파견원으로 광복단 소대장 고봉준(高鳳俊)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관리들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11월에는 의주에서 홍식(洪植)과 함께 밀정 박윤권(朴允權)을 살해하고 의주·선천·철산 등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1년 1월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독립단원을 극력 검거하는 철산경찰서 백량주재소(柏梁駐在所) 한국인 순사 김의주(金義柱)를 살해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의주·선천지방에서 독립호소문을 살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2월 한철수(韓哲洙)·신계관(申啓寬) 등과 함께 나자현(羅子賢)의 집에서 일본헌병보조원 하성진(河成鎭)을 만나 광복군이 국경을 내왕할 때 편의를 제공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불응하므로 사살하고, 이중간첩인 나자현도 총살한 후 만주로 귀환하였다.

1921년 8월 다시 군자금 모집차 국내로 들어왔다가, 형 김익곤(金益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평양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22년 7월 처형되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집필자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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