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구미 출생.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영화계에 투신하였다. 카프(KAPF)의 연극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안종화(安鍾和)·이우(李愚)·이경손(李慶孫) 등이 1927년에 영화예술 연구를 위해 조직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입하였고, 거기에 카프파 영화인들을 끌어들였다.
1928년에 신경향파(新傾向派) 계열의 최초의 영화이며 무산계급 농민의 저항을 그린 「유랑(流浪)」을 처음으로 감독하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1929년에는 협회의 명칭이 시대에 뒤떨어졌다 하여 서울키노(혹은 서울영화공장)로 개칭하고 제2회 작품으로 무산계급 민중의 서러움과 투쟁을 그린 「혼가(昏街)」를 감독하였다.
이 영화도 흥행에는 실패하였지만 무산계급영화의 제작을 전국적으로 파급시켰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프로영화 제작은 자본부족으로 거의가 제작 중에 중단되었다. 제3회 작품으로 「화륜(火輪)」(1931)을 감독해 내놓았으나 계급투쟁과 사상을 지나치게 직선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무성영화시대에 무기로서의 영화운동을 펼쳤던 카프계열의 영화는 여기서 막을 내렸다. 1938년에는 이구영(李龜永)·이명우(李明雨)·김태진(金兌鎭)·안종화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를 개최하였다.
1939년에는 최금동(崔琴桐)의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인 「애련송(愛戀頌)」의 감독을 맡아 재기하였고, 1940년에 「수선화」를 감독, 그 개봉을 앞두고 죽었다. 그는 프로영화운동을 펼친 영화감독으로서, 노골적으로 좌익으로 기울지는 않고 민족항일기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