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영화사(漢陽映畫社)가 제작하였고, 1942년 1월 10일 서울 성보극장(城寶劇場)에서 개봉되었다. 촬영은 이신웅(李信雄)이 맡았으며, 이금룡(李錦龍)·고기봉(高奇峰)·김덕심(金德心)·문예봉(文藝峰)·김영순(金永順) 등이 출연하였다.
비가 촉촉히 내린 어느 초여름 날, 들에 논물을 대러 갔던 어떤 마을청년이 물 때문에 이웃마을 청년과 싸우다가 그를 죽이고 만다. 결국 살인죄로 복역하게 되자 약혼녀의 부모들이 딸에게 다른 혼처를 정해 시집갈 것을 강요한다. 부모의 성화에 못 이긴 약혼녀는 결국 가출하고 만다.
세월은 흘러 3년 형기를 마치고 나온 청년은 약혼녀를 찾으러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약혼녀를 찾기는 하였으나 그녀는 어느 술집의 작부로 전락하여 있었다. 그러나 약혼녀가 비록 작부노릇을 하였을망정 순결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청년은 그녀를 데리고 신개지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이기영이 『현대일보』에 연재한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줄거리는 평범한 신파조 애정물 같지만 젊은 남녀의 애정에 대한 모랄과 새로운 정신적 희망을 갈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예영화의 기질을 다분히 풍기고 있다. 그러나 제작비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1940년 초 제작이 완료되자마자 압류되었다가, 1942년 빚을 갚고 난 뒤에 상영되었다.
또한 이 영화는 지주와 소작 인간의 반목과 갈등을 통해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열에 걸려 여러 부분이 삭제당하였다.
이 영화는 일제 말기에 순전히 한국인에 의해 제작된 마지막 작품이었으며, 곧이어 조선어말살정책과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한 계몽선전영화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는 계몽영화 등 일본인과의 합작영화시대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일제 말기의 몇 편 안 되는 순수한 민족계몽영화라는 데 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