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철종 13) 개령현감(開寧縣監)으로 재직 중 삼정문란과 서리들의 발호로 민생이 도탄에 빠진 지 이미 오래 되어 진주민란이 일어난 지 40여 일 지난 뒤 익산에 이어 개령에도 민란이 일어났다. 읍민 김규진(金奎鎭)이 격문을 돌리고 민심을 흉흉하게 하자 김후근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에 안인택(安仁宅)·이복대(李卜大) 등이 주동이 되어 읍민 수천 명이 난을 일으키자 이방 문기표(文基杓) 등은 표리부동하게 난에 화응하였고, 정지평(鄭之平) 등은 동헌에 불을 질러 문서를 불태우고 그곳의 부호 박경주(朴慶柱), 전 이방(吏房) 우학능(禹學能), 전 수교(首校) 우해룡(禹海龍) 등 5명을 박살시키는 한편, 읍내외의 집 50여 채에 방화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현감된 책임으로 영광군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