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출신 유학생들이 1906년 3월 조직한 것으로 사무소는 일본 동경 이다바시정(飯田橋町)에 두었다. 목적은 회원간의 친목도모와 신교육 보급이었다.
매월 둘째 주 일요일에 총회를 열어, 1908년 1월 해산하기 전까지 23회에 걸쳐 모임을 가졌다. 임원의 임기는 6개월이었으며, 1907년 12월 정기총회에서 회장 문내욱(文內郁)이 물러나고 김기환(金淇驩)이 회장에 선출되었다.
임원으로는 회장 외에 부회장·총무원·평의원·간사원·서기원·편찬원·편찬부 회계·총회 회계를 등을 두었다. 회원수는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1907년 10월『낙동친목회학보』 창간호를 간행한 뒤부터 월간으로 1908년 1월 제4호까지 발행하였다.
체제는 논설·학해(學海)·문원(文苑)·사전(史傳)·잡찬·휘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설에는 민족의 잊을 수 없는 비극에 대해 설욕할 것을 주장하는 글들이 많다.
사전에는 징기스칸·비스마르크의 전기가 실려 있으며, 잡찬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도요토미(豐臣秀吉) 사이의 왕복 문서를 소개하는 최남선(崔南善)의 글이 실려 있다.
휘보에서는 회의 활동뿐 아니라 유학생 전체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 강제로 유학 간 영친왕 이은(李垠)이 동경에 도착한 소식과 유학생들의 출영 장면을 싣고 있다. 학보는 회원과 찬성원은 물론 국내의 각 학교·단체 등에 보내졌다.
그 밖에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해 하기 휴가를 이용하여 교원 양성 또는 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회원 이인수(李寅銖)가 1907년 하기 휴가 때 귀국하여, 200여 마지기의 의연(義捐)으로 기장군(機張郡)에 학교 설립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동래부 부사 한치유(韓致愈 : 전 일본유학생 감독)는 중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서적·기계 등의 구입을 회에 위탁하기도 하였다. 1908년 1월 대한유학생회·호남학회 등과 함께 대한학회로 통합되었다. 통합 후에 부회장 이은우(李恩雨)는 대한학회의 부회장으로, 회장 김기환은 평의원 겸 편찬부장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