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놀이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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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줄불놀이
선유줄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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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뱃놀이나 시회(詩會) 때 또는 사월 초파일 · 대보름밤 등에 밤하늘에 흩어지는 불꽃을 관상하던 성인남자놀이.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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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불놀이, 낙화유(落火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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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선비들의 뱃놀이나 시회(詩會) 때 또는 사월 초파일 · 대보름밤 등에 밤하늘에 흩어지는 불꽃을 관상하던 성인남자놀이.
내용

‘낙화유(落火遊)’·‘줄불놀이’라고도 한다. 밤하늘에 흩어지는 불꽃을 관상하던 운치 있는 놀이로, 주로 뱃놀이나 시회·관등놀이 등에서 놀이의 흥을 돋우기 위해 행하였다.

뽕나무나 소나무 또는 상수리나무 껍질을 태워 만든 숯가루를 한지주머니에 채우고 그것을 나뭇가지나 긴 장대 또는 추녀 끝이나 강가 절벽 위에 줄을 매고 매달아 불을 붙인다. 그러면 불씨주머니에 든 숯가루가 타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이러한 모습이 마치 ‘불꽃’이 떨어져 날아가는 것 같아 ‘낙화놀이’라고 불리었다.

이 놀이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동의 경우 뱃놀이·낙화놀이·달걀불놀이·줄불놀이 등의 네 가지 놀이로 이루어진다. 이곳의 낙화놀이는 선조 때의 공신 유성룡(柳成龍)이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뒤 그의 형과 더불어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유래를 근거로 17세기초부터 놀아왔다고 하나, 그 시기는 훨씬 이전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하회동은 낙동강이 ㄹ자형으로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가운데 있으며, 강가에 만송정(晩松亭), 북쪽 연안에 겸암정(謙菴亭)·옥연정(玉淵亭)이 있고, 두 정자 사이에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 부용대(芙蓉臺)가 있어, 낙화놀이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다. 음력 7월 16일 밤 달이 떠오르면 10여명의 선비들이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룻배를 타고 강물 위에 뜬다.

배에는 네 기둥을 세워 차일을 치고, 휘황한 초롱을 달아 주위를 밝힌다. 서로 술잔을 권하며 정담을 나누다가 흥이 생기면 <적벽부>를 외우면서 시창(詩唱)으로 청풍과 명월을 즐기는데, 기생들도 장구를 치면서 노래와 춤으로 흥취를 돋운다.

이때 배 위 하늘에는 줄불로부터 불꽃이 꽃가루처럼 떨어지고, 상류로부터는 수많은 달걀불이 흘러내리며, 부용대 마루에서는 불덩이를 던져 강기슭이 불꽃으로 뒤덮이게 한다. 줄불은 가장 이채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마을주민들이 여름철부터 만든 것이다.

뽕나무 숯가루에 소나무껍질 숯가루를 약간 섞어서, 창호지로 만든 45㎝ 가량의 봉지에 넣는다. 이 봉지는 지름이 2∼3㎝ 정도로 길이 5㎝ 되는 곳마다 노끈으로 허리를 묶고, 긴 새끼줄을 마련하여 4∼5m 간격으로 한 봉지씩 단다.

새끼줄을 부용대 마루 위의 소나무에 걸고, 끝은 만송정의 소나무에 매어다는데, 만송정 쪽에서 마른 쑥으로 봉지 끝에 불을 붙이면, 부용대 쪽에서 서서히 당겨올린다. 봉지의 불은 천천히 타오르면서 ‘따닥따닥’ 소리를 내고 불꽃이 꽃가루 흐르듯이 허공에서 물 위로 떨어진다.

이러한 줄불은 서너 곳에 마련하나 때로는 부용대 절벽과 겸암정 사이에도 걸어 다는 일이 있었다. 달걀불은 원래 빈 달걀껍질에 심지를 박아서 기름을 부어 불을 켜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와서 바가지 쪽을 100여개 마련하여 기름을 먹인 솜뭉치를 놓고 불을 붙였다.

그리하여 부용대 위쪽 형제암 부근에서 20∼30개씩 띄워 보내면 물결을 타고 천천히 옥연정 앞 소를 향하여 흘러가서 맴돌게 되어, 뱃놀이에 한층 흥취를 더하게 된다. 이 무렵에 이따금 낙화가 있다. 부용대 절벽 마루 위에 서너 명이 올라가서 솔가지를 다발로 묶은 단에 불을 붙여 “낙화야!” 하는 소리와 함께 강을 향하여 힘껏 내던진다.

이 낙화는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다가 밑쪽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고, 그 흩어지는 불꽃이 장관을 이루게 된다. 이 놀이는 낙동강을 적벽강에 대비시키고 부용대를 적벽으로 생각했으며, <적벽부>의 칠월 기망(旣望)을 본떠서 7월 16일에 놀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절적으로 농한기인 데다가 낙동강의 수량도 적절하여 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얻을 수 있는 시기이다. 광복 이전까지 전승되다가 중단되었으나 그 뒤 재현된 바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경남·충남편-(문화재관리국, 1972·1975)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6)
『朝鮮の鄕土娛樂』(朝鮮總督府,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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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성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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