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경상북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5동.
조선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직영도사(直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안동부 목성산 기슭에 건립한 것이다. 그후 안동향교와 마주보고 있다 하여 선종 39년(1606)에 유림에서 현재의 위치인 서악사(西岳寺) 동쪽에 이건하였고, 1904년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무안왕묘(武安王廟) 1동, 묘우삼문(廟宇三門) 1동, 광감루(曠感樓) 1동, 동서재(東西齋) 2동이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공포를 갖춘 맞배 기와지붕 건물이다.
사당 안 중앙에는 채색된 관우의 소상을 모시고, 좌측에 왕포(王甫)와 조루(趙累)를, 우측에 주창(周倉), 관평(關平)의 입상을 배향(配享:모심)하였다. 관우상은 좌고 160㎝로서 위엄을 갖추어 수염이 난 얼굴에 무장의 의상으로 채색되어 있다.
관왕묘는 임진왜란이 한창인 시기에 우리 나라 여러 곳에 건립되었는데 선조 30년(1597)에 전라남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 진북(鎭北) 용금산에 탄보묘(誕報廟), 같은 해에 전라남도 남원부 서문밖에 탄보묘, 같은 해에 경상북도 성주성(星州城) 동문밖에 관왕묘, 선조 31년(1598)에 안동부, 같은 해에 한양 숭례문 밖 산록에 남묘(南廟), 선조 35년(1602)에 한성 동쪽 흥인문밖에 동묘(東廟)를 건립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의 관왕묘는 창건연대와 유래를 알 수가 없다. 관북, 관서의 것은 영조 22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고, 서울의 북묘는 고종 20년(1883) 왕명으로 송동(宋洞)에 건립하였으며, 제반 절차를 동 · 남묘와 동일하게 하였다.
이들 관왕묘는 대체로 적군이 북상하는 통로에 중국의 장군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조정에서도 못마땅하였으나 유신(儒臣)들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한 기록들이 보인다. 예전(禮典)은 왕이 친제할 때에는 일배(一拜)나 이배를 하고, 배위문신은 절향(節享) 및 고유제(告由祭:신명에게 고하는 제사)가 없었다.
숙종 37년(1711)에 왕명에 의하여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대로 하게 하고, 매년 경칩과 상강일에 향과 축(祝)을 보내어 각기 도(道)에서 행제케 하였다. 찬품(饌品)은 오례의(五禮儀)의 소사(小祀) 차례대로 하여 팔변팔두(八邊八豆)였다.
그러나 정조 5년(1781)에 정위(正位) 절향 찬품을 십변십두로 고쳐 행제케 하였다. 유식(儒式) 절향은 전국의 관왕묘에서 조선말기까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이나 현재 안동의 관왕묘는 완전히 민속 신앙화하여 일반 민중이 관왕의 탄생일인 음력5월 13일과 기일인 10월 21일을 정제일(正祭日)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