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청련암은 남지장사의 부속암자로 신라 신문왕 4년(684) 양개조사(良介祖師)가 왕명으로 남지장사를 창건하면서 그 암자로서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유정(惟政) 휘하의 승병들이 훈련장으로 사용하였으나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뒤 1653년(효종 4)부터 1714년(숙종 40)까지 인혜(印惠) · 승민(勝敏) · 지월(池月) 등이 중건 · 중창하였고, 1806년(순조 6)에 화재를 입어 2년 뒤 재건되었다.
간결한 포작(包作)과 화반(花盤 :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으로 수장하고 단청으로 채색한 평삼문을 들어서면 여염집을 연상시키는 듯한 고색 짙은 건물이 乙자형으로 길게 놓여 있고, 그 뒤로 근래에 지은 산령각이 위치해 있다.
남향한 3칸 인법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1칸 온돌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마루와 온돌방 1칸을 앞쪽으로 돌출시켰으며, 우측에는 앞쪽에 방을 꾸미고 뒤쪽에 큰 부엌을 두고 그 뒤로 1칸을 돌출시켜 온돌방을 두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인법당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였으며, 앞뒤에 반칸 폭의 툇마루를 두어 방의 앞쪽 어간에 양개궁판(문의 아래 낮게 끼워 댄 널) 띠살문을, 좌우에는 머름 위에 낮은 띠살창문을 두어 출입을 구분하였다. 뒤쪽에는 불단시설이 없는 양 협간에만 외여닫이 살문을 냈다.
전열 기둥은 모두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연결되어 장여와 소로[小累]로 수장하였다. 툇마루 상부에는 굽은 퇴량을 사용하여 보아지와 함께 기둥에 결구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법당과 요사 · 후원의 기능을 겸하는 복합건물로, 평면이 아주 특이하며, 구조는 소박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옛 법식의 수법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