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명의 전달, 음식물 감독, 청소, 궐문 수직 등 궐내의 잡무를 맡아보던 내시부의 벼슬아치를 이르던 용어이다. 본래 고려시대에는 숙위 혹은 근시(近侍) 관원이었으나,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함으로써 환관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조선시대 내시부(內侍府)는 상선(尙膳: 종2품), 상온(尙醞: 정3품 당상관), 상다(尙茶: 정3품 당하관), 상약(尙藥: 종3품), 상전(尙傳: 정4품), 상책(尙冊: 종4품), 상호(尙弧: 정5품), 상탕(尙帑: 종5품), 상세(尙洗: 정6품), 상촉(尙燭: 종6품), 상훼(尙烜: 정7품), 상설(尙設: 종7품), 상제(尙除: 정8품), 상문(尙門: 종8품), 상경(尙更: 정9품), 상원(尙苑: 종9품) 등 14개 직책에 모두 140명의 내시를 정원으로 규정하였다.
내시들도 일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 밖에서 처첩을 거느리고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근무 형태는 크게 장번과 출입번으로 나뉘어 교대로 근무하였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궐내에 상주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한 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래 선천적인 거세자를 대상으로 충원하였다. 그러나 내시가 되면 경제적 혜택이 상당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에 지원하여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내시들도 양자를 택하여 가계를 이어갔고 족보를 작성하였다. 내시 족보로는 1805년(순조 5)에 이윤묵(李允黙)이 편찬한 『양세계보(養世系譜)』 등이 전해진다. 이 족보에는 내시 777명의 자호, 본관, 생몰년, 묘소 위치, 배우자의 본관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내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826년(흥덕왕 1) 12월조에는 “왕비와 사별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흥덕왕(興德王)이 시녀도 가까이하지 않고, 좌우에 오직 환수(宦竪)만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내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사료에 등장하는 환수가 조선시대의 내시와 같은 신분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고려시대에는 숙위 혹은 근시 관원이었으나,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내시는 환관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내시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문제가 생기면서 내시 세력을 견제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내시의 득세를 억제하려는 정책에 따라 고려 말에 비해 내시의 세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내시의 역할 가운데 궁궐 안의 잡무를 담당하는 면은 고려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 때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신의 위치를 확보한 내시가 많았던 반면, 조선의 내시들은 주어진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내시 제도는 1894년에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