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 등의 공사를 책임맡은 장인(匠人)이다. 이는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578)와 안압지에서 출토된 불명의 작성비에 보이고 있다.
신라의 장인은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목공을 장인이라고 부르던 것과 차이가 있다. 특히 신라 중고기 금석문 가운데 「명활산성작성비」·「무술오작비」·「남산신성비」에서 사용된 장인의 이름은 '공(또는 장)인'에서 ‘(장)척’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각 시기별로 장인의 성격에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먼저 현전하는 신라 최초의 축성비인 「명활산성작성비」(551)에는 관등을 가진 ‘장인’과 ‘공인’의 이름이 보인다. 여기서 ‘공인’은 재지사회의 유력자로서 재지 장인집단을 거느리고 직접 성을 쌓는 거리를 부여받는 기술적 책임자였다. ‘장인’은 중앙에서 파견된 상인나두(上人邏頭)나 지방의 군중상인(郡中上人)을 보좌하고, 그들의 기술적 자문에 응했던 존재였다.
이후 공인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무술오작비」(578)에서 ‘대공척(大工尺)’의 이름이 보인다. 이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불명의 작성비에도 나타나는데, 「명활산성작성비」의 ‘공인’과 같은 성격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대공척은 직장의 성격상 「남산신성비」의 단계에서 다시 ‘작상인(作上人)’으로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종래에 장인을 집단으로 파악하는 방식에서 각 직능에 따라 편제 구분하면서,
「남산신성비」에 보이는 장척(匠尺)·문척(文尺)·면석착인(面石捉人)·소석착인(小石捉人)을 거느리고 작업을 진행하는 책임자로서의 역할에 걸맞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 때문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