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사(大伯士)’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장인들을 거느리고 해당 작업을 책임 맡은 우두머리이다.
박사라는 명칭은 중국 춘추시대 말기부터 경술(經術)에 능통한 유가계통(儒家系統)의 인물에 부쳐진 이름이었다. 진(秦)나라 때에는 경술(經術)의 연구와 정치의 고문 및 스승의 일을 담당하는 관료였다.
신라의 경우는 백제·고구려보다는 조금 늦게 신문왕 때 국학을 설치하면서부터 확인되지만, 기술직을 박사로 일컬은 것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하였다.
「울진봉평신라비」(524)의 “立石碑人 喙部博士(입석비인 탁부박사)”라는 데에서 그가 봉평비를 세우는 일을 총괄했고, 탁부에는 ‘박사’라는 명칭만으로 통용될 수 있는 특유의 기술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박사직이 대박사·차박사(次博士, 助博士) 등으로 분화된 것은 대체로 삼국통일 이후의 일일 것으로 믿어지는데, 경덕왕 때를 전후해 대(大)·차(次, 또는 助)박사 등으로 구분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처럼 박사의 명칭은 중고기에도 존재했으나, 중대 무렵에 국학·누각전 등의 관사에 중국식 박사제를 시행하면서 점차로 보편화되었다. 8세기 중엽 경덕왕대를 전후해서는 대박사·차박사 등으로 분화되었고, ‘백사(伯士)’라는 명칭과 혼용해 왕경과 지방을 막론하고 관등을 가진 공장을 지칭하였다. 그런데 〔표〕를 볼 때 박사의 명칭은 점차 일반 장인이나 승장(僧匠)들에게도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기술직으로서 대박사·차박사의 구분은 관등의 고하에 따라 해당작업의 책임자를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성덕대왕신종명」에 보이는 ‘종성대박사 대나마 박종익, 차박사 나마 박빈나·나마 박한미, 대사 박부부’ 등은 5두품의 신분자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는 대박사·차박사의 구분이 관등의 고하-신분의 구분보다는 기술의 고하 및 해당 기술분야에서의 연륜을 포함하는 복합적 의미로서의-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장인이나 승장의 경우에 있어서 대박사·차박사의 구분은 해당공사의 책임자와 이를 보조하는 장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데 따른 것으로서, 상설직으로서의 의미는 없었다.
또 관등을 가진 장인으로서 박사 또는 백사(伯士)의 칭호를 가진 자는 4두품부터 6두품에 해당하는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본래 관장에게 한정해 사용했던 ‘박사(博士)’라는 칭호를 ‘백사(伯士)’와 혼용해 사용하게 된 것은, 박사의 명칭이 점차 사회 일반에 확대됨으로써 그 음을 따서 중앙관사의 공장뿐만 아니라 지방의 공장에게도 확대 적용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일반 승장에게도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종래 관등을 가진 장인에 국한되었던 박사의 명칭이 일반 승장에게까지 부여된 것은, 최소한 9세기 초엽에 이르러 승장들이 각 분야에서 관장에 버금할 만한 기술을 습득했고, 이에 박사의 명칭이 대장의 의미를 지닌 공사의 책임자를 일컫는 명칭으로 전화·확산되었다.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