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중앙 승관은 진흥왕 때에 국통(國統) 1인-도유나랑(都唯那娘) 1인-대도유나(大都唯那) 1인-대서성(大書省) 1인의 체계였다. 그 뒤 진덕여왕 때에 대도유나와 대서성의 정원을 각각 1인씩 늘렸다. 그리고 788년(원성왕 3) 소년서성(少年書省)에 2인의 정원을 두면서 정비되었다.
대도유나는 대통-도유나로 이어지는 중국 북제(北齊)의 승관체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신라 551(진흥왕 12)년 고구려에서 온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으로 삼으면서 보량법사(寶良法師)를 이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785년(원성왕 1) 승관제를 ‘정법전(政法典)-중앙승관-지방승관’의 체계로 다시 정비했으나, 대도유나는 중앙승관직으로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후반에 새로이 대통(大統)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872년(경문왕 12) 작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 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를 보면, 황룡사 자체에 ‘대유나(大維那)-도유나(都唯那)-유나(維那)’의 체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유나는 대도유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9세기 후반 무렵에 종래 중앙 승관직의 명칭이었던 대도유나가 각 사찰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대도유나란 이름으로는 각 사찰의 직임과 중앙 승관직과의 구분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 승관직인 대도유나의 명칭을 대통으로 바꾸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대도유나가 대통이란 명칭으로 바뀌게 되면서, 대도유나는 각 사찰의 삼강직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