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적사는 조선 숙종 15년(1689) 성해대사(性海大師)가 건물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면서부터 비로소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이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는 극락전은 불교도의 이상향인 극락정토를 표현하고 있는 법당이다.
대적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인 876년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하였으나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졌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자리에 초옥 3칸의 암자를 짓고 대적사라 불렀다. 1689년(숙종 15)에 이르러 성해대사가 삼존불을 모시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에 18세기경에 중건된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의 특성은 기단에 집중된 듯하다. 월대와 같이 상하단에 높게 댓돌을 쌓고 가운데에 소맷돌을 갖춘 돌계단을 두었다. 넓은 장대석판에 종횡으로 선을 양각하고 선이 교차하는 부분에 꽃문양 등이 양각되어 있으나 부재들이 부분적으로 맞지 않고 계단 소맷돌에는 구름문양을 새겼는데 댓돌과도 접합부분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창하면서 초창 때 사용되었던 부재들과 일부 신재가 혼용된 결과라 보인다.
평면구성은 어칸은 넓게, 좌우 협칸은 좁게 한 조선후기 간잡이법을 보여주고 있다. 창호는 하부에 종방향으로 2등분하여 궁판을 넣은 띠살무늬로 어칸에 3분합, 협칸은 쌍여닫이문을 두었으며 우측면 가운데 기둥에 기대어 외짝여닫이문을 달아두었다.
공포는 전후열에만 시설한 다포계열로 내외 2출목이며 주간포는 1구씩 두었다. 그러나 창방은 양측면에도 돌려 두었다. 전면의 제공은 외측은 연화를 얹고 내측은 전체를 하나로 하여 연당초무늬로 초각하여 대량을 받도록 하였으나 뒤편은 초각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다르다. 상부가구는 내목도리를 두지 않은 관계로 삼분변작으로 처리하였으나 중도리 사이가 좁고 종량이 높아져 천장이 어색하나 대량의 천연스러움이 어색함을 다소 희석시키고 있다. 천장은 층급이 있는 우물천장으로, 상단천장은 종보 하단 높이에 설치되었다. 하단 천장은 어칸과 협칸이 다르게 구성되었는데, 어칸에는 내목도리장여 높이에 설치되었고, 협칸에는 내2출목장여 상단에 사용된 가첨장여 높이에 설치되었다. 협칸 천장의 반자는 단순한 각재를 사용하여 구성되었던데 비해 어칸 상단 천장의 반자는 장식된 소란이 사용되고, 반자틀이 교차되는 곳에는 연꽃 문양의 장식재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우물에 용두, 용신, 용꼬리, 여의주를 조각한 장식판 등을 돌출시키거나 매달아 위계에 따라 장식의 정도를 다르게 하였다.
처마는 전후면 모두 서까래와 부연을 갖춘 겹처마로 구성되었고, 양측면에는 박공과 방풍판이 설치되었다. 극락전은 5량가이면서 서까래는 장연만을 사용하여 독특한 구성을 보이는데 미황사 응진당의 경우에도 동일한 처리방식이 보인다.
건물은 다포 계열로 중기 이후의 일반적인 법식을 따랐으나 기단 부분은 17세기 이전의 양식과 조각수법을 지니고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