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 ()

근대사
단체
1895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유학생 단체.
이칭
이칭
친목회, 제국청년회
목차
정의
1895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유학생 단체.
개설

일명 친목회라고도 한다. 1895년 5월초 113명의 관비 유학생(조선정부 위탁 유학생)이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 뒤, 어윤적(魚允迪)·이병무(李秉武)·윤치오(尹致旿)·박희병(朴羲秉) 등이 재학생들 친목도모·학식교환, 한국문화의 계발에 목적을 두고 설립한 최초의 일본 유학생 단체였다.

연원 및 변천

임원으로는 회장·부회장 외 평의원·간사·회계·간첨(幹籤)·간지(幹誌)·간독(幹督)을 두었다. 초대 회장으로 윤치오가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하여 부회장 어윤적이 뒤를 이었다.

1896년 4월 회장에 홍석현(洪奭鉉)이, 부회장에 안형중(安衡中)이 선출되었다. 1897년 11월 회장에 전태흥(全泰興)이 선출되었으나, 회원간의 이견으로 재선거하여 조제환(趙齊桓)으로 결정되었다.

관비유학생이 아닌 자가 입회할 경우 회원의 보증이 필요하였는데, 1895년 6월 게이오의숙에 입학한 제2차 관비유학생 26명 전원이 입회함으로써, 같은 해 10월 현재 회원수는 186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을미사변를 거치며 귀국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1897년 11월 70여 명으로 감소하였다.

회원들은 가마쿠라[謙倉] 같은 유적지 외 박물관·하세대불사(長谷大佛寺)·하치만구[八幡宮]·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등을 견학하였으며, 사법성(司法省)·문부성(文部省)·대장성(大藏省) 등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병식훈련(兵式訓鍊)을 자주 실시하여 사격훈련까지 받았으며, 병사잡지를 구독하는 등 군사훈련에 관심을 보였다. 또, 학식 교환을 위해 정치법률·경제·만국군제·경무·감옥제도·교통·동양문제·동양신체 등 다양한 주제로 강화회(講話會)·연설회 등을 열었다. 그리고 1897년 5월 도요청년회관(東洋靑年會館)에서 ‘외교방책’이라는 의제로 소국회(小國會)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1896년 2월부터 『친목회회보』를 간행한 이후 계간으로 6호까지 발행하였다. 편집목차는 사설·논설·문원(文苑)·강연·내외보(內外報)·만국사보(萬國事報)·잡보·회중기사(會中記事)의 순이었다. 회보는 회원과 찬성원 외 국내 각 학교와 정부기관에 보내졌다.

회원들은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를 당하자, 40여 명이 집단으로 귀국하고, 아관파천 뒤에는 전회원이 정과(停課)를 결의하는 등 반일의식·존왕의식(尊王意識)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들은 선진문물과 과학기술을 습득하여 한국 근대화의 추진세력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정책의 속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형성된 것은 후쿠자와(福澤諭吉)의 동양주의에 대해 영향받은 바가 컸을 것이다.

1898년 초부터 회원간의 불화가 계속되어 결국 9월 제국청년회(帝國靑年會)라 개칭하고 규칙도 개정하였다. 제국청년회는 연설회·토론회의 개최와 『제국청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03년 2월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으로 대부분의 회원이 귀국한 뒤 해산하였다.

참고문헌

「한말(韓末)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사상(思想)과 활동(活動)」(김상기, 『교남사학(嶠南史學)』 1, 1985)
「친목회회보(親睦會會報)」
「친목회규칙(親睦會規則)」
집필자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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