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책. 인쇄본.
저자는 1792년(정조 16) 남인 계열의 시파(時派)로 소를 올릴 때 그 소장(疏章)을 찬한 바 있다. 그 뒤에도 사도세자 사건에 얽힌 여러 가지 이면적인 문제를 철저히 정리, 기록해 ‘천유록(闡幽錄)’이라 이름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여기에서 저자는 시·벽파의 갈등에 관한 것에 대해 의리를 진실하게 밝히기 위해서 자기가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귀로 들은 것과 문헌에 나타난 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 내용에 동감하면서도 곧바로 세상에 내놓지 못할 것을 알고 ‘대천록’이라 이름을 고치게 하여 저자에게 다시 내려보냈다. 그 뒤 정조가 죽고 벽파(僻派)가 다시 득세하자 저자는 이전에 상소한 일과 ≪천유록≫을 지은 일 등으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1806년(순조 6) 벽파가 몰락하자 저자의 증손 제대(齊大)가 원편(原編) 1통을 복사하고 1806년 이후 시·벽파의 사건에 관계되는 사실을 수집해 후록으로 붙여두었으나, 이 또한 널리 발표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1897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숭된 뒤, 저자의 5대손 승집(勝輯)이 1934년 박문서관(博文書館)을 통하여 간행하였다.
편차(編次)는 상·중·하편과 후록으로 되어 있다. 체재는 편년체 형식으로 연간지(年干支)와 월일을 기재하고, 1건(件)이 끝나면 끝에 전거(典據)를 밝혀주고 있다. 책 끝에는 정만조(鄭萬朝)의 서문과 박승집의 후지(後識)와 발행인 이원영(李源永)의 발문이 있다.
내용을 보면 상편에는 영조 즉위와 동시에 노론의 득세, 그리고 사도세자가 노론 계통인 벽파의 질책을 받는 경위 및 남인 계통인 시파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경위 등으로 엮어지면서, 1762년 세자의 죽음까지가 수록되어 있다.
중편은 왕세손에 관한 기사와 사도세자의 복위, 그리고 영조의 죽음, 정조의 즉위 후 시파가 다소 힘을 얻고 수원에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묘를 천봉하고 ≪장릉지 莊陵誌≫를 개찬하게 하는 등 1791년까지의 기사를 수록하였다.
하편은 1792년 시파의 잇따른 상소와 벽파가 몰리는 상황 등으로 1800년 정조의 죽음까지의 기사가 실려 있다. 후록은 순조 즉위 후 벽파의 득세와 1807년 벽파가 다시 몰락하는 경위를 저자의 증손 제대가 추후로 수록(手錄)한 것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파에 속한 저자가 사도세자 사건을 주제로 하여 시파 입장에서의 의리를 천명한 것이다. 정조가 명해 찬한 ≪명의록 明義錄≫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당시 시·벽파의 대립과 갈등을 통한 정세(政勢)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장서각도서에 편자 미상의 필사본이 있는 것은 인쇄본이 나오기 전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