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취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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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정악 및 대취타 / 대취타 / 구군악
피리정악 및 대취타 / 대취타 / 구군악
국악
작품
문화재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영문(營門)에 소속된 취타수(吹打手)에 의해 연주되던 행진곡풍 군례악(軍禮樂)의 일종.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피리정악 및 대취타(피리正樂 및 大吹打)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무형문화재(1971년 06월 10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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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영문(營門)에 소속된 취타수(吹打手)에 의해 연주되던 행진곡풍 군례악(軍禮樂)의 일종.
내용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영문(營門)에 소속된 취타수(吹打手)에 의해 연주되던 행진곡풍 군례악(軍禮樂)의 일종.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아명(雅名)으로는 <무령지곡 武寧之曲>, 속명으로는 <대취타>, 세칭 <구군악 舊軍樂>이라고도 부른다. 선전관청과 도성(都城)의 5영문(五營門)에는 대취타를 상설했으며, 각 지방의 감영 · 병영 · 수영에도 두었고, 각 고을에는 <소취타>를 두었다고 한다.

<대취타>는 임금의 노부(鹵簿:임금이 거둥할 때의 의장, 또는 의장을 갖춘 행렬) · 행행(幸行) · 능행(陵幸:임금이 친히 능에 행차하는 것), 왕실(王室)의 동가(動駕: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가는 것) 등에 사용되었음은 물론, 군대의 행진 및 개선, 주장(主將)의 좌기(坐起:출근하여 사무를 보던 일), 진문(陣門)의 개폐 때, 통신사의 행렬 때, <검기무 劒器舞> · <선유락 船遊樂> · <항장무 項莊舞> 등의 정재(呈才)에 쓰였다.

취타라는 의미는 부는 악기[吹樂器]와 치는 악기[打樂器]의 연주를 말하며, 이러한 특유의 연주형태로 연주되는 음악까지를 포함하여 상용하고 있다.

<대취타>의 악기 편성은 시대와 의식의 규모에 따라 다르나, 현재 연주되고 있는 악기편성은 태평소(太平簫)만이 유일하게 선율(旋律)을 연주하는 취악기이며, 나발(喇叭) · 나각(螺角:소라) 등 일정하지 않은 단음의 단조로운 취악기와 북 · 장구 · 징 · 자바라(啫哱囉) 등 무율타악기(無律打樂器) 들로 구성된다.

또한, 현재 연주되고 있는 <대취타>를 중심으로 음악내용을 살펴보면 장(章)은 7장으로 구성되었으며, 1장단은 12박(拍)으로 소삼(小三) · 대삼(大三)이 모여 이루어졌다.

이 곡은 모두 19각 반각(제1각 제1박에서부터 제20각의 제6박까지)으로 되어 있는데, 제7장 끝에서 제1장 제3박으로 반복하는 도드리형식[還入形式]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은 장단의 처음 또는 중간에서 시작하고 끝맺는 부정형(不定型)으로 분장(分章)되어 있는 것이 다른 곡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분장법이다.

대취타에는 연주자 외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사(執事)가 있다. 집사가 <대취타>가 시작되기 전 지휘봉이라고 할 수 있는 ‘등채’를 두 손에 받쳐들고 있다가 오른손만으로 잡고 머리 위로 높이 들고서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하랍신다.” 하고 호령하면 징을 치고 연주가 시작된다. 연주 복장은 전립(戰笠)을 쓰고, 황 철릭을 입고, 남전대(藍纏帶)라는 띠를 두르고, 미투리[麻土履]를 신는다.

한편, 문헌상으로는 1612년(광해군 4) 7월 상완(上浣)에 송한교(宋韓嶠)가 쓴 ≪연병지남 練兵指南≫에 ‘대ᄎᆔ타’라는 용어가 처음 보인다. 이 책에서는 <대ᄎᆔ타 大吹打>와 <ᄎᆔ타 吹打> · <쇼ᄎᆔ타 小吹打>의 용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징을 두 번 치고 <대취타>를 시작하고, 징을 세 번 치면 <대취타>를 그친다.” 등 <대취타> 연주법에 관한 기록이 있다.

1701년(숙종 27)의 일본 통신사행렬도(通信使行列圖) 중 행렬 앞의 취고수는 나발수 2인, 나각수 2인, 태평소수 2인, 세악수(細樂手) 1인, 동고(銅鼓:징) 1인, 고타수(鼓打手) 2인, 삼혈수(三穴手:미상) 1인, 쟁수(錚手:징) 2인으로 편성되었다. 이 밖에 통신사들의 행진에 <대취타>가 쓰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으로는 1711년 요시카와본(吉川本)의 ≪백석전집 白石全集≫과 1763년(영조 39)의 ≪수사록 隨槎錄≫ 등이 있다.

1787년(정조 11)의 ≪병학지남 兵學指南≫에 의하면 주장(主將)이 좌기할 때, 영(營)을 열고 닫거나 정(正)히 조련할 때, 조련을 마칠 때, 해산할 때 <대취타>(큰ᄎᆔ타)를 한다.

이 밖에 <대취타>에 관한 기록으로는 ≪정종실록≫에 있는 <병조장용영이화성조야조정식계 兵曹壯勇營以華城操夜操程式啓>, 1844년(헌종 10)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가 漢陽歌>, 1872년 정현석(鄭顯奭)이 지은 ≪교방가요 敎坊歌謠≫, 1876년 4월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의 ≪일동기유 日東記遊≫, 1893년에 만들어진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 등이 있다.

또한 1926년 박승엽(朴承曄)이 펴내고, 김석태(金錫泰)가 그린 <조선열성조능행도 朝鮮列聖朝陵行圖>에는 어전취타(御前吹打)와 어전세악(御前細樂)이 있다.

<대취타>를 연주하던 내취(內吹)들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예전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에 관한 제반 사항을 기록한 각종 의궤(儀軌)에 악기별, 즉 징 · 북 · 호적 · 자바라 · 나발 또는 나각의 연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1971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당시의 기능보유자로는 최인서(崔仁瑞)가 지정되었으며, 1998년 현재는 정재국(鄭在國)이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69-대취타-(문화재관리국, 1970)
『한국음악사』(장사훈, 정음사, 1976)
「대취타와 취타와의 관계」(이동복,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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