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이후 일본 관비 유학생 파견재개와 사비 유학생의 증가에 따라 출신지·관비·사비 등에 의해 여러 유학생단체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단체의 운영과 사업의 충실화를 위해 각 단체의 통합이 요구되었다. 그 결과 1906년 7월 대한유학생구락부와 청년회가 민충정공추도조회(閔忠正公追悼弔會)를 마치고 통합하여 대한유학생회가 설립되었다.
대한유학생회는 1895년 설립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가 해산된 뒤, 최초의 유학생통합단체가 되는 것이다. 설립 목적은 회원상호간의 친목도모와 학식의 교환은 물론, 서양문물의 수용을 통한 국가실력의 향상에 있었다.
주요 활동으로는 학보발간·추도회·토론회·연설회·조대모의국회사건항의(早大模擬國會事件抗議)·단지동맹후원(斷指同盟後援)·국채보상운동·유학생단체통합운동 등을 들 수 있다.
1907년 3월부터 5월까지 월간으로 발행된 학보는 신교육구국론과 애국론 등에 관한 논설을 비롯하여, 워싱턴 등의 영웅전 그리고 국내외의 정세와 유학생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1906년 11월 민충정공순절기년추도회(閔忠正公殉節朞年追悼會)를, 1907년 2월 최면암선생추조회(崔勉庵先生追弔會)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안창호(安昌浩)·김규식(金奎植) 등의 연설회와 회원간의 토론회를 개최하여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을 배양하였다.
또한, 일진회(一進會)로부터 학비가 끊김에 따라, 1907년 1월 5일 단지(斷指)하여 학업의 완수를 결의하였으며, 그리고 단지동맹을 학보에 소개함은 물론, 학업의 성취는 조국의 시운을 만회하는 데 있음을 지적하면서 일진회의 처사를 규탄하였으며, 부회장 박승빈(朴勝彬)을 국내에 보내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밖에 1907년 3월에 일어난 조대모의국회사건에 항의하였으며, 국내의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학생단체의 통합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07년 4월 낙동친목회(洛東親睦會)를 통합하였는데, 1908년 1월호남학회(湖南學會)와 더불어 대한학회(大韓學會)라는 신통합단체로 흡수되면서 발전적 해산을 이루었다.
주요 인물로는 회장을 역임한 상호(尙灝)·최석하(崔錫夏)·최린(崔麟)·박승빈과 학보의 편집인 최남선(崔南善)과 발행인 유승흠(柳承欽)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