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 두륜산(대둔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넓은 산간분지에 계류를 끼고 자리하고 있다. 정연한 가람배치와 달리 여러 불전들을 지형 조건에 맞추어 배치하여 자유로움과 조화를 느낄 수 있다.
『대둔사지(大芚寺誌)』(1823)에 기록된 바와 같이 대흥사는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당우(堂宇)들을 배치하였다. 북원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백설당, 청운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종무소 등이 또 다른 군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남원의 오른편에는 표충사와 부속건물, 성보박물관이 있고 그 뒤편에는 대광명전이 또 다른 별원(別院)을 형성하고 있다.
『대둔사지(大芚寺誌)』에 의하면 천불전은 조선시대인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불탔으나 2년 뒤인 1813년에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와 제성(濟醒)대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천불전에는 1817년에 조성된 천불상(千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경주에서 조성되어 해남 대흥사로 옮기기 위해 1817년 11월, 2척의 배에 실렸으나 1척이 풍랑으로 표류해 일본까지 갔다가 돌아와 1818년 8월 15일 천불전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雙峰寺)의 화원승(畵員僧)으로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 조성을 담당했던 풍계현정(楓溪賢正)이 기록한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1821년)에 기록되어 있어, 천불전의 중건과 천불 조성 및 봉안의 역사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
큰 대문채와 같은 단층 5칸 맞배집인 가허루(駕虛樓) 중앙의 문간(門間)을 거쳐 천불전 안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서향하여 자리한 천불전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봉향각, 오른쪽에는 옛 강원이던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北院)에 비하면 마당은 크지 않지만 공간의 규모에 맞게 당우들의 형식이 갖추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인 천불전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의 원형기둥 위를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다시 평방(平枋)을 얹었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내4출목(內四出目)으로 살미첨차[山彌檐遮]의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앙서는 연꽃봉오리로 조각하였다. 어간(御間) 정면 기둥머리에는 용두조각이 끼워져 있다.
가구(架構)는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걸었다. 좌우 측면의 어간 기둥의 대들보에 용머리로 장식된 충량(衝樑)을 걸었다. 천장은 우물천장과 빗천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물천정의 반자 중에는 범어(梵語)가 쓰여진 것도 있다.
정면에는 3칸 모두 빗꽃살과 소슬빗꽃살창문을 달고, 왼쪽 측면에는 외짝문을 달았으며, 이외의 나머지 면은 모두 벽체로 마무리하였다. 벽체는 인방재로 상하를 나누어 상부에는 내외부 모두 각기 다른 벽화가 그려져 있고 하부는 세로로 세운 판재로 마감하였다.
내부 불단에는 삼존상 뒤로 1,000여 개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정면의 계단 좌우로는 당간지주가 각기 자리하고 있다.
대흥사 천불전은 평면 비례와 공포 배치, 상부가구 등에서 천불을 봉안하기 위한 합리적인 계획수법에 의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불전의 건축형식과 세부적 수법은 인근의 미황사 대웅전(1754년), 불갑사 대웅전(1764년), 불회사 대웅전(1808년) 등과 유사하다. 조선 중기 이후 성행한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로서 짜임새가 매우 화려하면서도 우아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흥사 천불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천불전 건물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또한 천불전의 중건과 내부에 봉안된 천불 조성의 역사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