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13m의 마애불로, 196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덕주사는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누이 덕주공주(德周公主)가 건립한 절이라고 하는데, 한국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마애불은 남쪽 화강암 벽면 가득히 부조되었는데, 얼굴과 어깨는 도드라지게 조각되었고 그 아래는 선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법의의 옷주름도 도식화되어 그 규모에 비하여 조형 수법은 졸렬한 편이다. 마애불의 양어깨 위에는 사각형의 건물 가구공(架構孔)들이 남아 있어, 조성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으며, 비만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과장되게 표현되어 예배상으로서의 숭고미는 찾아볼 수 없다. 목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얼굴이 상체에 맞붙어 버렸으며, 삼도(三道)는 가슴 위에 선각되어 있다. 비만한 신체 역시 인체의 조형적 특성이 무시된 채 괴체화(塊體化)되었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힘없이 늘어져 원호를 그리고 있다. 옷주름 역시 힘이 빠져 생동감을 잃었다. U자형으로 늘어진 법의의 앞자락과 양 무릎 위에 표현된 동심타원형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의(佛衣) 형식이 도식화된 것이다. 왼쪽 팔목에 걸쳐 흘러내린 소맷자락도 무의미한 몇 가닥 음각선으로 주름져 있다.
지나치게 과장된 양손은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향하고 있어, 설법인(說法印)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법의 자락 밑으로는 평행하는 세로줄의 옷주름을 새긴 군의(裙衣)가 표현되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다. 발 좌우에는 발을 감싸듯 너비가 넓은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을 배치하여 대좌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거불 조성의 추세에 힘입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이지만, 비만한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한 조형, 입체성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그리고 현저하게 도식화된 옷주름 등의 조각기법은 불상의 규모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