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두리 ()

의생활
물품
조선 후기, 무신이나 시위가 겨울철 융복에 착용한 방한모.
이칭
이칭
만선두리(滿縇頭里), 만선두리(漫船頭裡), 만선휘항(滿縇揮項), 만선휘항(滿扇揮項), 만선호항(滿縇護項), 만선(滿扇), 만선(萬縇)
물품
재질
검은 공단|초피|서피
용도
방한용
제작 시기
조선 후기
관련 의례
행행|인산|군행
내용 요약

만선두리는 조선 후기 무신(武臣)이나 시위(侍衛)가 겨울철 융복(戎服)에 착용한 방한모이다. ‘만선’은 옷 또는 모자의 테두리에 둘러진 담비 꼬리털[貂尾] 장식을 일컫는 말로, 만선두리는 모휘항의 정수리를 제외한 가장자리를 담비털로 풍성하게 장식한 형태이다. 겨울철 행행(行幸), 인산(因山), 군행(軍行) 때 모구(毛具)를 갖추라는 교지를 받은 후에 착용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무신이나 시위가 겨울철 융복에 착용한 방한모.
연원

‘만선’은 담비의 꼬리털[貂尾]을 사용하여 옷 또는 모자의 테두리에 두른 장식을 의미한다. 만선을 두른 모자라는 의미의 ‘만선두리’는 만선을 두른 휘항이라는 의미의 ‘만선휘항’ 또는 ‘만선호항’과 동일어로 조선 후기의 문헌에서 주로 발견된다. 효종대에 만선휘항은 부유한 역관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매우 드물고 비싼 모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18세기 이후 영 · 정조 시기에, 만선두리는 무관의 융복 구성품으로 무관과 왕궁 시위들이 추운 겨울이 되면 모두 착용하는 모자로 기록되고 있다.

형태와 제작방식

만선두리는 정수리를 제외한 모휘항의 가장자리를 담비털로 풍성하게 장식한 형태이다. 모휘항은 겉은 검은 공단, 안은 초피 또는 서피를 댄 방한모로, 정수리 부분은 트여있고 이마 부위에 걸쳐져 머리에서 목덜미까지 덮는 형태이다. 뒷중심 상단 부분에 트임이 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섬용지편에는 “담비 꼬리털로 사방의 가장자리에 가선을 대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바람이나 추위를 막는데 최고”라고 하였다.

관련 풍속

18세기 영 · 정조 시기, 담비 꼬리털의 가격은 은이나 인삼의 가격에 맞먹을 정도여서 담비 꼬리털을 단 휘항 한 개의 가격은 100냥이 넘었다. 그러나 종들도 모두 만선을 쓸 정도로 모피 모자는 상당히 유행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담비 꼬리털을 사용한 만선을 금지하고, 대신 족제비 꼬리털을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족제비 가죽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 북쪽 지방에서 생산된 것만을 사용하게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에도 휘항에 대한 규격을 내려 너무 크게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성대중(成大中)『청성잡기(靑城雜記)』, 정약용(丁若鏞)『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의하면 만선호항은 조선시대 겨울철 무관 융복의 구성 품목 중 하나였다. 입동(立冬)과 춘분(春分), 겨울철 행행(行幸), 주1과 같은 왕실 행사나 주2주3를 갖추라는 교지가 내려지면, 본병(本兵)의 총부(摠府)와 시위하는 모든 신하[侍衛諸臣], 금군(禁旅)이 모두 만선휘항을 착용하였다. 1800년 정조의 국장 때에도 무관과 시위 백관들이 방한구로서 만선휘항을 착용하였다. 1811년(순조 11)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참전한 서정군(西征軍) 좌초관 방우정(方禹鼎)『서정일기(西征日記)』에서 겨우내 착용한 만선휘항을 음력 2월 28일이 지나자 인편에 집으로 돌려 보내는 일화를 기록하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효종과 숙종대에 만선두리는 부유한 역관이나 소유 가능했던 희귀하고 값비싼 방한모였다. 이후 영 · 정조대에는 만선두리가 겨울철 무관 융복의 구성품에 포함되고, 담비 꼬리털을 사용한 만선이 금지되어, 만선휘항의 크기가 제한되고 사치가 규제되면서 실용성을 띤 방한모로 기능하였다. 궁궐 시위의 만선휘항이 허리까지 길어지고 가장자리 털 장식이 과시적으로 풍성해지자 재차 규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정조 20). 1844년(헌종 10)에 백관들의 방한모[耳掩] 제도가 개정되었다. 소풍차(小風遮)와 삼산건(三山巾)을 기본으로 당상관은 담비털, 당하관은 검은 털로 선을 두르도록 하였다. 이 때 선의 두께를 만선과 같이 두텁게 하지 않도록 하였다. 무신의 만선두리는 기존 제도 그대로 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무관의 군복과 융복이 주4 군복, 서양식 군복과 같은 신식 군복으로 빠르게 교체되면서 주5과 신식 군복에는 방한모로 남바위 형태의 모자를 착용하게 하였다.

융복용 방한모로서의 만선두리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8세기 만선두리 착용 모습과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회화작품으로는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홍도 <풍속도병> ‘설중행사’와 필자미상 <풍속도병> ‘투전’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청성잡기』
『연경재전집』
『고운당필기』
『여유당전서』 公服議
『송남잡지』
『임원경제지』 섬용지
『오주연문장전산고』
『홍재전서』
『일성록』
『서정일기』
『正宗大王殯殿魂殿都監儀軌, 上』 甘結, 庚申10月13日

논문

김성희, 『조선시대 방한모에 관한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박양희, 『조선시대 복식에 사용된 가죽과 모피에 관한 연구』(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0)
안인실·이민정, 「휘항 재현품 제작을 위한 고증과 제작 방법 연구」(『한국복식』 45,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21)
장경희, 「조선후기 한중 방한모자의 비교」(『문화와예술연구』 14,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2019)
주석
주1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妃)들의 장례. 또는 상왕, 왕, 왕세자, 왕세손과 그 비(妃)들의 장례. 우리말샘

주2

군대의 행진이나 행동. 우리말샘

주3

털로 만든 방한구. 우리말샘

주4

조선 고종 18년(1881)에 조직한 근대식 군대. 일본인 교관을 채용하여 근대식 군사 훈련을 시키고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 우리말샘

주5

조선 후기에, 마군(馬軍), 보군(步軍) 가운데서 힘세고 무예에 능한 사람을 뽑아 편성한 군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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