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백(士伯), 호는 청헌(靑軒). 이조참판 목첨(睦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목서흠(睦敍欽)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며, 어머니는 윤창언(尹昌言)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 1678년 통덕랑(通德郎)으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검열이 되었다. 평안도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바 있으며, 1682년 지평·부수찬·정언을 거쳐, 이듬해에 수찬·정언·부교리를 역임하였다.
남인이 득세한 1689년 아버지 목내선이 좌의정에 오르고, 목임일은 이조좌랑·부응교·응교·집의·승지·대사간·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세력이 축출당함에 따라 남해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695년에 풀려났다.
그러나 1701년 민비가 죽자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중궁으로 올리자고 심단(沈檀)·민언량(閔彦良) 등과 더불어 상소를 올렸던 죄로 국모모해사건의 발각과 동시에 남인의 세력이 완전히 축출당할 때 다시 장흥에 원찬(遠竄)되었다.
그 뒤 여러 번 구제의 상소가 있은 뒤 1704년에 풀려났다. 비록 관로(官路)에서는 굴곡이 있었으나 당시 왕의 인물평으로는 사람과 물건을 상해(傷害)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