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된 높이 13.9㎝의 불감으로 삼존불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년)의 원불(願佛)로 중국당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없으며, 지눌의 활동연대가 고려시대이므로 그 전래 경위와 연관을 짓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송광사성보박물관에서 한때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이다.
불감은 세쪽이 경첩으로 이어진 구성으로 닫으면 포탄형(砲彈形)을 이룬다. 중앙의 감(龕)에는 본존인 불좌상과 그 좌우에 나한(羅漢)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좌우 감에는 각각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불감은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의 불감을 중심으로 좌우에 불감이 문비(門扉)처럼 달려서, 열면 너비가 17㎝가 되고 닫으면 팔각기둥 모양으로 되며, 윗부분은 둥근 반구형(半球形)을 이루는 포탄 형태의 불감이다.
중앙 감 불상은 머리의 나발(螺髮)이 뚜렷하다. 얼굴은 옆으로 약간 추켜올려진 눈, 뾰죽한 코, 붉은색이 남아 있는 입 등의 표현에서 약간의 위엄과 긴장감이 도는 표정을 볼 수 있다. 법의(法衣)는 두 어깨를 덮었는데 주름은 두 개의 줄로써 표현하여 마치 인도 및 서역풍의 조상(彫像)을 모방한 듯하다. 오른손을 들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였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서 법의의 끝을 쥐고 있다. 법의는 대좌를 엎고 있는 상현좌(裳懸座)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상현좌는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형태로 2단으로 이루어져 상단의 주름은 대칭되는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하단의 주름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다.
불상의 좌우에는 두 나한이 서 있다. 오른쪽의 나이든 제자는 가섭(迦葉)으로 보주(寶珠)를 들었고, 왼쪽의 젊은 제자 아난(阿難)은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두 보살 협시는 나한의 밑쪽에 배치되어서 연화(蓮花)를 들고 서 있다. 가는 허리와 두 다리의 윤곽이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오른쪽 보살상의 앞에는 공양자(供養者) 같은 상이 있으나 왼쪽에는 없어졌다.
불상의 대좌는 법의의 주름으로 덮여 있다. 그 밑에 향로를 가운데 두고 고행인(苦行人) 혹은 공양인으로 추정되는 두 상이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서 의자에 앉아 있다. 그 옆으로 사자가 있으나 왼쪽의 사자는 파손되어 없어졌다. 감실의 천개(天蓋) 부분에는 장막(帳幕)이 둘러지고 여러 가지 구슬 장식이 있으며, 화염에 싸인 보주 장식이 약간 붉은색을 띠고 조각되었다.
대좌의 밑부분에는 고사리같이 생긴 수목(樹木)이 투각(透刻)되어 위의 연화대좌들을 받치고 있다. 좁은 공간에 여러 상들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투각 기법과 고부조(高浮彫)로 표현된 상들은 입체감이 있고 공간성이 강조되어 있다.
오른쪽의 감실에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사자가 받치고 있는 대좌 위에 앉아 있다. 오른손은 파손되어 없으나 왼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이 있고 목걸이와 X자형으로 교차된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왼쪽에는 연봉오리를 쥔 자그마한 보살상이 서 있다. 사자의 오른쪽에는 거의 나신(裸身)의 시자(侍者)가 두 다리를 굽힌 채 사자를 붙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왼쪽의 감실에는 코끼리좌에 앉아 있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역시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오른손은 들었으나 손가락을 앞으로 굽히고 있다. 반가(半跏)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반가의 자세를 취한 협시보살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중국당(唐)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하는 일본 고야산(高野山)의 곤고후사[金剛峯寺]에 있는 박달나무[檀木] 불감, 당나라의 변상도 등에서 흔히 확인된다. 보현보살의 오른쪽에도 영락 장식을 한 작은 보살입상이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코끼리의 시자는 오른쪽에 발을 약간 굽히고 있다.
천개에는 좌우 불감 모두, 같은 모습으로 늘어진 구슬 장식 위에 비천상(飛天像) 셋이 투각되어 있다. 천의 자락은 위로 나부끼면서 좁은 공간이나마 운동성을 보이며 장엄(莊嚴)함의 효과를 높여 주고 있다. 가운데 비천 부분과 사자와 코끼리의 머리 부분은 불룩 튀어나오게 조각되어, 세 부분의 불감이 합치면 직각으로 만나서 꼭 닫히게 조성되었다. 이 불감의 두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본존은 석가모니불로 추정된다.
일본의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인 공해(空海)가 806년경 중국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것이라고 전하는 일본 고야산(高野山)의 곤고후사[金剛峯寺]에 있는 박달나무 불감과 불감의 형태나 구조, 문양 장식 불상의 배치 등 양식이나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중앙 감의 본존은 옷의 착의법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2단으로 이루어진 상현좌의 상단의 U자형으로 대칭되는 옷주름과 하단의 여러 겹치는 주름 등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우측감의 문수보살에서 나타나는 2줄의 연주문으로 이루어진 X자형 영락, Y자형으로 이루어진 목걸이 등 역시 곤고후사[金剛峯寺]의 좌우 감의 보살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목조 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그 속에 조각된 상들은 원형 조각에 가까울 만큼 고부조이다. 또한 세부 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불감의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불상들의 표현이 이국적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전래하는 다른 불상들과 양식상 비슷하며 일본 고야산(高野山)의 곤고후사[金剛峯寺]와는 형태, 구성 및 재료가 동일하여 당나라 때 제작된 불감으로 추정된다.
당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이른 시기에 조성된 매우 희귀한 예로 불감을 닫으면 포탄형을 이루고 열면 세 부분으로 펼쳐지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는 목조불감(木造佛龕) 형식의 이른 예를 잘 보여준다. 또한 포탄형식의 불감의 유입과 당나라 양식의 수용 문제를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이 불감은 경첩 등에 문제가 있어 2000년 5월~2001년 4월 1년간 일본에서 문화유산수리를 하고 있는 재일동포 고준영씨 및 국내의 금속공예명장 조성준씨 등이 참여하여 수리를 진행한 바 있으며, 그 과정을 정리하여 송광사에서 보고서로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