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층건물인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흙으로 빚은 거대한 크기의 소조삼존좌상이다. 2008년 6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본존상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존[향우] 관음보살과 우존[향좌] 대세지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불형식이다. 17세기 전반기 유행한 대형 소조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76년 7월 18일 복장품(腹藏品)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의해 조성 연대와 조성 연유, 조성자가 밝혀졌다. 조성 연대는 1633년(인조 11) 6월이다.
조성 연유는 특별한 경위를 밝히지는 않고 다만 불교신앙적 측면만 밝히고 있다. 끝부분에 ‘주상삼전하수만세(主上三殿下數萬歲)’라 되어 있는데, 이러한 문구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상투적인 문구로 왕실(王室)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유교적 충효사상과 결합된 당시 불교를 대변해 주고 있다.
불상 조성에 참여한 인물은 모두 191명이 참여하였다. 시주자(施主者)는 대표인 이효갑(李孝甲)을 비롯한 124명이 참여하여 불상 조성에 많은 인물이 재원(財源)을 담당하였으며, 이효갑이 관직이 없다는 점을 통해 시주자가 대부분 그 지방의 유지이거나 일반 백성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조선 초에 주로 왕실이나 중앙관료에 의해 불상이 조성되었던 점과는 다른 현상이다. 작가는 대화사(大畵師)인 현진(玄眞), 증명(證明)인 두인(斗仁), 차화사(次畵師)인 연묵(衍默)과 회묵(懷黙)으로 대형부상에 참여하는 작가군에 비하여 매우 적은 편이다. 작가군은 모두 승려로 이는 조선후기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현진은 1633년 법주사 대웅보전 소조삼불좌상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긴 당대 최고의 작가로 추정된다.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극락전 내 수미단을 앞으로 하고 바닥에 봉안된 불상으로 금산사 소조미륵삼존불입상과 동일하게 봉안되어 있다. 이는 대형 불상의 묵중한 무게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현재 대좌의 뒷부분이 후불벽(後佛壁)과 연결되어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체구 네모난 형태로 장중하고 괴체적이지만 부드럽고 질박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본존상의 머리 부분은 상투를 나타내는 육계(肉髻)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반구형(半球形)으로 정상계주(頂上髻珠)는 원통형으로 두드러지고, 중앙계주(中央髻珠)는 반달형으로 넓고 크게 표현하였다. 좌우협시보살상은 높은 상투에 보관으로 쓰고 있으며, 어깨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목구비(耳目口鼻)는 매우 크며, 특히 눈두덩이 두툼하고 인중이 넓다. 이에 반해 백호는 돋을새김으로 아주 작다. 삼도는 목과 가슴이 나뉘는 부분에 치우쳐 음각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공통된 특징이다. 상체는 건장한 편이지만 어깨가 경직되고 평판적이며 양감은 거의 없다. 손은 투박하지만 경직된 상체에 비하여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신체적 특징은 1619년 봉서사 소조아미타삼존불좌상, 1633년 수종사탑 금동불좌상군, 1641년 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삼세불좌상 등과 유사하다.
수인(手印)은 모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을 결하고 있어 아미타삼존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협시보살상 수인은 본존을 중심으로 대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의(佛衣)은 이중착의식(二重着衣式) 통견(通肩) 형식이며, 보살의(菩薩衣)의 경우도 본존상과 동일하다. 옷주름은 강직하고 직선적인 선과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어깨 위에서 내려오는 3가닥의 직선과 다리에 나타나는 3가닥의 직선은 17세기 전반기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보살상은 보관, 귀걸이, 팔찌, 영락 등의 장식을 하고 있다. 특히 보관의 중앙에 좌협시보살상은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화불(化佛)을, 우협시보살상은 대세지보살을 상징하는 정병(淨甁)을 표현하고 있어 보살상의 존명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슴의 흘러내린 3가닥의 영락장식은 조선 초부터 유행한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대좌는 조선시대 일반적 형식으로 3단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닥과 후불벽과 결합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17세기 대규모 사찰에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불상을 대표하고 있다. 아미타, 관음, 대세지라는 존명이 밝혀져 조선시대 아미타삼존 도상을 연구하는데 그 가치가 높다.
이미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조성연대와 작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불신의 전체적인 모습이 단순화된 감이 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했던 당시 불교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