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초명은 민성징(閔聖徵), 자는 사상(士尙), 호는 졸당(拙堂)·용졸(用拙). 승지 민기문(閔起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이(閔涖)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민유부(閔有孚)이며, 어머니는 정척(鄭惕)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아버지의 사촌동생인 도정(都正) 민유경(閔有慶)의 집에서 자랐다. 1606년(선조 39) 생원이 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사관·행호군(行護軍)·사용(司勇)을 지냈으나, 조정 내의 부조리를 보고 외직을 희망하였다.
그래서 강원도사·영변판관(寧邊判官)과 금산·여주의 목사를 거치는 동안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쌓았다. 1617년 외직생활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강원도관찰사가 재직 기간 중의 치적을 국왕에게 상계해 통정(通政)에 올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계기로 동부승지에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다가 우승지가 되었다. 1624년 개성부유수 재직시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관내에 있던 반란파를 상계하기 전에 죽인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1625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형조참판을 지내던 중 1627년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즉위를 축하하는 등극사행의 부사로 다녀왔다. 해로를 택해 가던 중 폭풍를 당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1630년 평안도감사가 되어 부체찰사를 겸했는데, 의주성을 수축하고 백마(白馬)·검산(劍山)·자모(慈母)의 3성도 수축하였다. 또한, 선사(宣沙)·광량(廣梁) 등지에도 진을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등 관서 30여 군의 변방강화에 힘썼다.
1631년 가도(椵島)를 다스리는 데에도 역량을 발휘했으며, 다음 해도 꾸준히 노력해 가도의 한장(漢將)도 무모한 요구를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함경도감사를 지낼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 서우신(徐祐申)과 함께 보병과 기병 1만 3000명을 통솔하고 맹활약을 하였다.
난중에 병으로 감사의 자리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1637년 다시 평안도감사로 복직하였다. 그 때 양서관향사를 겸하였다. 1640년 척화파로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2년에 귀환하였다.
귀환한 다음 호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1647년 사은부사로 북경(北京)에 가는 도중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러 병이 났으나 북경에 도착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추증, 평양과 정주에 생사당(生祠堂)이 건립되었다. 저서로는 『송경방고록(松京訪古錄)』이 있다. 시호는 숙민(肅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