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鳴皐)·창주(滄洲). 민총(閔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주목사 민세주(閔世舟)이고, 아버지는 민영(閔韺)이며, 어머니는 심해(沈瀣)의 딸이다. 좌의정 민희(閔熙)·좌찬성 민점(閔點)·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지평을 역임하고, 1635년 홍문록에 올랐다.
1638년 필선·사간·수찬·장령·교리를 거쳐, 1644년 광주목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아갔다. 다음 해 내직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내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왜신 접대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1646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부사로서 형률 집행에 매우 근엄하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때 왜관(倭館)의 담이 헐자 왜인들이 이를 이용, 왜관을 넓혀줄 것을 강청하였으나, 민응협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의 세를 꺾었다. 1649년 동래부사에서 안변부사로 전임하였으며, 이듬해 경상감사가 되었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성·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53년(효종 4) 왕조실록을 춘추관과 사사고(四史庫)에 분장(分藏)할 때 어명으로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이를 보살폈다. 1655년 도승지가 되고, 다음 해 함경감사를 거쳐, 1657년(효종 8)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그 뒤 다시 대사성·대사헌·병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대사헌의 직을 사퇴하고, 그 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