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명(仲明). 할아버지는 민위(閔湋)이고, 아버지는 민정백(閔挺栢)이며, 어머니는 남두징(南斗徵)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 검열이 되고, 다음 해 예문관봉교를 역임하였다.
이 때 마침 강화에 있는 정족사고(鼎足史庫)에 문제가 발생하였는데,『인조실록(仁祖實錄)』의 을유년 기사 40여 자가 칼로 도려진 것이었다. 이 기사는 봉림대군(鳳林大君)에 관한 내용인데 이 일을 밝혀내는 소임을 맡은 적이 있다. 같은 해 정언을 거쳐 1695년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부사 이희무(李喜茂)와 같이 대왜관계에도 진력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검약생활에 관한 소를 올려 왕의 찬사를 받았다.
이 해 또한 송시열(宋時烈)과 조광조(趙光祖)의 공형(共亨)문제에 관해서도 소를 올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뒤 1697년 교리가 되고, 다음 해 검토관(檢討官)을 역임하는 등 그 뒤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