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기(聖基). 호는 독송정(獨松亭). 할아버지는 민처중(閔處重)이고, 아버지는 민진유(閔鎭有)이며, 어머니는 이오(李梧)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영조 3)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36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듬해 당시 사간(司諫)이던 조태언(趙泰彦)을 당습지인(黨習之人)으로 논척(論斥)하였다.
당시 탕평책으로 당색을 드러내기는 힘들었으나 노론계임을 내세워 1740년 지평(持平)으로 삼사의 합계(合啓)를 올려 죽은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신원하는 데 힘썼다. 이어서 정언·필선(弼善)·장령(掌令)을 거쳤고, 1741년 사과(司果)로 과거응시자 심계연(沈繼衍)이 역적 심성연(沈成衍)의 동생임을 밝혀, 원방(原榜)을 취소시키게 하였다. 장령이 되어서는 남유용(南有容)의 찬배를 막으려고 힘썼으나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1746년 집의(執義)로 있을 때는 언로를 넓게 개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뒤 사간·보덕(輔德)·집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노년에는 첨지판결사(僉知判決事)에 제수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