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운봉(雲峰). 아버지는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박신(朴信)이다.
1419년(세종 1) 태종의 서녀(庶女) 정혜옹주(貞惠翁主)에게 장가가서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품계가 자헌대부에 올랐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26년에는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로 나갔다가 이 해에 사은 겸 진하사(謝恩兼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 1428년에 선위사로 황주와 평양에 나갔으며, 1432년에도 선위사로서 황주와 함길도에 나갔다.
1436년 호조판서에 임명, 숭정대부에 승진되었으며, 이 해에 외직으로 나가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42년 삼군장수(三軍將帥)에 참가하고, 이 해에 호조판서로서 선공감제조를 겸직했으며, 이듬해 의금부제조와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직하였다.
1444년에 판호조사(判戶曹事)에 승진, 이 해 부친상으로 사직했으나 1445년 왕명으로 기복(起復)해 판호조사·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47년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임명되고, 1449년에 함길도도체찰사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 세력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할 때 협력해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54년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어 군읍(郡邑)의 연혁을 자세히 조사해 사군혁파(四郡革罷)를 건의하였다. 집이 대대로 부유해 윤사로(尹師路)·윤사균(尹士昀)·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저축한 재물이 서로 동등했으므로 사부(四富)라 일컬어졌다. 시호는 성렬(成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