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을 중퇴하고 서울 중림동성당[당시 약현성당(藥峴聖堂)]이 운영하던 가명(加明)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1925∼27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풍경과 정물을 그린 유화를 출품하여 거듭 입선했다.
이 때문에 각광을 받다가 1928년에 파리로 그림 유학을 떠나 연구소에서 수업하였다. 1929년에는 르 살롱(Le Salon)과 야수파 계열의 살롱 데 튀를리(Salon des Tuileries) 등에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때 미국의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으로 연구 여행을 떠나 파리에 잠시 머물렀던 임용련(任用璉)을 만나 그곳에서 결혼하고 1930년에 서울로 함께 돌아와 한국 최초의 부부 양화가 귀국 작품전을 동아일보사 전시장에서 가졌다.
1931년에는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하게 된 남편을 따라가서 그곳에서 주부 생활과 그림 생활을 병행하였다.
1934년 파리와 미국 유학의 선배였던 이종우(李鐘禹) · 장발(張勃) · 김용준(金瑢俊) · 길진섭(吉鎭燮) · 구본웅(具本雄)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최초의 본격적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牧日會)’와 그 작품전에 남편 임용련과 더불어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다.
민족적 의식을 내포했던 목일회의 움직임이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해체당했다가 1937년에 ‘목시회(牧時會)’로 개칭하여 재기할 때에도 정주에 있으면서 동참, 작품전을 같이 했다.
그 외의 작품 발표로는 1936년까지 지속된 민족사회 미술가들의 서화협회 연례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1937년에 그려진 환상적인 별천지의 구도와 공상적인 인물표현의 대작 「낙원(樂園)」이 유일하게 전해져 삼성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따름이다.
정주에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38선 이북의 공산 체제 구축을 보며 가족 모두 서울로 탈출하여 새로이 정착했다. 그러나 6 · 25 전쟁 발발 직후 남편 임용련이 공산당 조직에 끌려가 생사 불명이 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 뒤 백남순은 화가생활을 중단하고 홀로 어린 아들딸을 보살피며 1964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한 뒤인 1980년 무렵부터는 뉴욕에서 다시 화필을 잡기 시작하여 노경(老境)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심을 담은 「한 알의 밀알」(1983년), 「영광」(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의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