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토기는 백제의 영역 안에서 제작, 사용된 토기이다. 중국 타날문토기와 원삼국시대의 토기를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제작기술 측면에서 적갈색연질토기, 회색연질토기, 회청색경질토기로 구분된다. 주로 승문(繩文)과 격자문(格子文)이 타날수법(打捺手法)으로 시문되어 있다. 일상생활용기, 제사용기, 부장용기 등으로 분류되는데, 일상생활용기가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다. 부장용기는 옹관주이나 장골용기(藏骨容器)로 쓰인 화장용기(火葬容器) 등이 있다. 주변 인접국과의 부단한 교류를 통하여 국제성과 개방성을 갖춘 토기로 성장, 발전하였다.
백제토기는 제작기술 측면에서 소성도에 따라 적갈색연질토기, 회(흑 · 백)색연질토기, 회청색경질토기로 구분되며 문양은 주로 승문(繩文)과 격자문(格子文)이 타날수법(打捺手法)으로 시문되어 있다. 그러나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와 같은 특수 기종은 표면처리나 문양구성에서 일반적인 토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기종은 대략 20여 종으로 그 가운데 삼족토기(三足土器)와 직구호(直口壺), 고배(高杯)는 백제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며, 삼족토기는 백제의 가장 고유한 기종이라 할 수 있다.
백제토기는 중국 전국(戰國)계 타날문토기와 낙랑계 영향 아래 발생된 원삼국시대의 토기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게 된다. 또한 한강유역의 적석총, 대형 봉토분, 풍납 · 몽촌토성 등 한성기 백제 초기유적에서 흑색마연 기법으로 제작된 고배 · 직구단경호(直口短頸壺) · 직구광견호(直口廣肩壺) · 삼족토기와 같은 새로운 토기 기종이 출현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종의 출현을 백제 국가성립의 지표로 이해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대부(大夫)명, 정(井)명 토기와 각종 생활용기, 서진(西晉)대의 시유도기(施釉陶器), 전문도기(錢文陶器), 낙랑 토기와 가야 및 일본계 토기 등이 출토되어 국제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웅진기에는 한성기 토기의 기종이 대체로 이어지면서 몇 가지 새로운 기종이 추가되고 기형적 변화가 이루어진다. 기대(器臺)는 한성시기의 원통형에서 고복형(鼓覆形)으로, 삼족기는 반형(盤形)이 사라지고 유개삼족기(有蓋三足器)가 제작된다.
고배나 삼족기의 배신(杯身)은 깊은 것에서 잠차 낮고 편평해지는 변화가 관찰된다. 직구단경호도 계속 제작되지만 몸체가 둥글며, 어깨의 문양대가 거의 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한성시기 후반에 등장한 개배(蓋杯)가 보편적으로 제작 · 사용되는 것이 웅진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사비기에는 삼족기 · 고배 · 개배 · 직구단경호 · 광구장경호 · 기대 등의 전통적인 기종들이 일정 부분 이어지다가 대부완(臺附盌) · 접시 · 전달린 토기 · 자배기 · 벼루 · 등잔 · 호자(虎子) · 연가(煙家) 등의 새로운 토기 기종들이 추가된다. 이 중에는 탄소흡착기법으로 표면을 흑색으로 도포한 토기질이 무른 흑색연질토기로서 자배기와 대상파수부호가 만들어진다.
한편 웅진시기 이래로 도입된 중국의 금속기나 자기를 모방한 대부완과 사이부장경호(四耳附長頸壺) 등이 만들어지거나 자기를 모방한 연유도기(鉛釉陶器)들도 제작된다. 이와 함께 사비기 후기로 가면서 회색연질로 제작된 토기들이 증가하고 규격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양상은 관(官)의 지배 하에 토기 생산체제가 직접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백제의 중앙집권 강화와 관료제 시행 등을 통해 ‘율령국가’로 백제 사회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사비기에 처음 등장하는 전달린 토기는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토기이다. 이 토기는 대부완의 구연부 아래에 횡으로 약 2㎝ 정도의 전을 부착한 이후에 일부를 잘라낸 토기이다. 부착된 전의 개수에 따라 2개와 3개가 확인된다.
부여 능사〔능산리사지〕하층에서 출토된 것은 외면에는 칠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칠은 칠목기를 모방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 아차산과 구의동의 고구려 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고구려와의 관련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이 토기는 백제의 왕도 지역인 부여와 익산에서만 확인되는 독자적인 특징도 보이고 있다.
한편 영산강유역의 토기는 4세기 전반경까지는 금강유역 토기양상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략 5세기 전반을 기점으로 장경호를 위시하여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가 등장하고, 이어서 백제 중앙의 개배가 더해지면서 이들 토기를 핵심기종으로 하는 영산강유역 양식 토기가 5세기 중엽 경에 완성된다.
이러한 영산강유역 양식의 토기는 백제 · 가야계 토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다양해지지만, 6세기 전반 이후에는 사비양식 백제토기로 통일화된다. 이와 같은 영산강유역 백제토기의 변천과정은 백제 영역으로의 편입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토기는 용도에 따라 크게 일상생활용기, 제사용기, 부장용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상생활용기는 다시 취사용기, 저장용기, 생활용기, 문방구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취사용기는 자비용기(煮沸用器)로서 당시 식생활과 연관된 토기로 시루 · 심발형토기 · 장란형토기 등 대부분이 저화도의 적갈색연질계로 소성되어 사용되었다.
저장용기의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호(壺) · 옹(甕)으로, 소성도 역시 연질과 경질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 이들 저장용기에는 각종 음식과 연관된 식재료는 물론 물 · 술 등을 보관하였으며, 용인 수지 백제시대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호에서는 다량의 철기가 출토되어 음식물과 연관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물품들도 보관하였음이 밝혀졌다.
당시 백제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생활용기의 대표적인 토기로서 호자와 등잔을 들 수 있다. 호자는 호랑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중국의 자기를 모방하여 제작된 것인데, 그 용도는 남성용 소변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주로 사비시기에 제작되었다. 문방구로는 벼루가 대표적인데 백제 사비기의 부여와 익산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당시 관료제도의 정비와 문서행정의 전문화가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부장용기로 사용된 토기로는 백제 고지(故地) 전역의 분묘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보통 일상생활용기 가운데 호를 부장용기로 전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죽은 자의 관으로 사용된 옹관이나 장골용기(藏骨容器)로 쓰인 화장용기(火葬容器)가 있다.
백제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고 장식성이 강하지 않고 단순하며 색조, 유려한 선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인들이 보다 절제되고 간결함을 추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성기부터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 토기가 고분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됨으로써 실용적인 면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토기는 백제문화의 국제적 · 개방적인 면과 상통하듯 중국, 고구려 등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백제화가 이루어졌고 일본에 토기제작 기술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백제토기는 중국과의 문화교류를 통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졌왔는데, 이는 백제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시유도기 · 전문도기 등 각종 중국제 도자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백제토기가 주변 인접국과의 부단한 교류를 통하여 국제성과 개방성을 갖춘 토기로 성장, 발전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