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건물이다. 보광사는 신라 668년(문무왕 8)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 세종 때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가 조상의 묘가 이 산에 있다고 하여 원당으로 삼고 재실인 추모재(追慕齋)와 만세루를 건립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보광사 극락전과 요사채가 뒷산과 골 안을 배경으로 ⎾ 모양으로 배치되고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만세루와 추모재가 사찰 진입을 가로막듯 입구에 ⏌ 모양으로 놓여 전체가 튼 ⎕자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사찰 규모가 심씨의 세력 부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극락전은 근년에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상량문에 만력(萬曆) 43년 12월 1일로 기록되어 있어 1615년(광해군 2)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높다란 자연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둥근 화강석 주초를 놓아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을 세웠다. 다포식 2출목으로 짜여진 공포(栱包)의 제공첨차와 화두아(花斗牙: 꽃무늬를 새기거나 초새김한 공포) 모양은 창경궁 홍화문(弘化門)과 같으며 3분두형 요두(要頭)는 오히려 더 초시적인 형상이다.
첨차의 내단부는 교두형(翹頭形)으로 이출목이고, 요두 위의 부재는 보아지형으로 만들어 초새김하는 등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우물마루 바닥에는 고주에 기대어 불단을 설치하고 상부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배면 공포는 내외부 모두 교두형 첨차로 이출목이고 윗몸의 3분두형 요두와 운공(雲工: 초새김한 짧은 부재) 등도 안팎이 같은 모양이다.
박공면의 풍판(風板)은 이출목 도리 높이에서 수평으로 끊어 한결 가벼운 느낌을 주고 있으며, 전면 창호는 좌우 협간을 띠살로, 어간에는 띠살 위에 팔모의 교살을 혼합한 분합문을 달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규모는 작으나 전형적인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박공판에 있는 현어(懸魚: 물고기 모양의 철물) 장식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