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封奏) 또는 봉장(封章)·봉소(封疏)라고도 하며 원래 중국에서는 천자(天子)에게 하던 것이었다. 봉사의 주된 목적은 왕이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천하의 이목(耳目)으로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고려시대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인된 기록이 아직 없으며,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즉 동반(東班)은 시·산(時散) 6품 이상, 서반(西班)은 시·산 4품 이상에 해당하는 중외(中外)의 인물들에게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백성의 폐막(弊瘼)에 대해서 의견서를 상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이 친히 보고, 실천할 수 있는 조목을 지적하여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면, 의정부에서는 그 조목을 잘 헤아려서 해당 조(曹)에 붙여 입법하게 하는 절차를 밟음으로써 국정을 백성의 편에서 올바르게 해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를 올릴 때의 문장이나 용어는 비록 서툰 점이 있어도 죄를 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상의 규정은 문종 즉위년에 정한 것이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그 품계나 내용의 한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봉사가 국정을 위하여 건설적인 의견이 되지 못하고 당쟁(黨爭)이나 무고(誣告)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봉사의 올바른 본보기는 이황(李滉)이 올린 <무진봉사 戊辰封事>나 박세채(朴世采)가 올린 <시무만언봉사 時務萬言封事>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