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계평장사봉하음백(季平章事封河陰伯) 봉천우(奉天佑)의 5세손이 자기의 선조가 발상(發祥)한 은혜를 기념하고 그 덕을 구호(救護)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234년(고종 21)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하고 고참정(故參政)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에 귀속시키고 민가를 철거시켜 임금이 행차하는 연로(輦路)를 넓혔다고 한다.
이때는 강화로 천도한 초창기였지만 팔관회(八關會)·연등회·행향(行香)의 도량(道場) 등은 한결 같이 구식에 의하였다고 한다. 2월에 행하였던 연등회는 고종 22년과 23년에도 계속되었다.
그 뒤 고종 36년∼46년 열한차례나 매년 2월에 이 절에서 연등을 하였으며, 또 원종도 재위 15년 중 7년 동안 이 절에서 연등을 하였던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봉천탑(奉天塔)이라고 하는 칠보석탑(七寶石塔)과 거석(巨石)으로 만든 하음노구석상탑(河陰老嫗石像塔)이 있었으며 절터의 상봉에는 봉천대(奉天臺)가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에는 축리소(祝釐所)였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와서는 봉화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