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중흥사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 고승 보우(普愚)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절이 대규모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고 난 후 도성의 방어를 위해 외곽에 대대적인 축성을 하여 북한산성을 완성한 1713년(숙종 39)이후다.
축성 당시에는 30여 칸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성이 완성된 뒤 136칸의 대찰로 증축이 이루어졌다. 성내에는 성을 지키기 위한 승군(僧軍)이 주둔하였는데 중흥사는 승군이 주둔하였던 북한산성 안의 11개 사찰을 관장하는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왕실에서도 8도의 사찰에 명을 내려 1년에 6차례 교대로 의승(義僧)을 뽑아 올리게 하여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승군의 정원은 360명으로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首僧) 1인과 승장(僧將)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설치하고 승대장(僧大將)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道摠攝)을 겸임하게 하였다.
중흥사는 승대장이 머물렀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그리고 이들 승병의 주둔에 필요한 물품과 군기물을 저장하기 위한 승창(僧倉)을 이 절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두었다.
승영 당시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萬歲樓)와 나한전(羅漢殿)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한동안 중건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5년 지홍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불사를 새로 시작하여 2012년 대웅전을 준공하였으며, 이후 불사가 계속 진행되어 2017년에는 만세루(萬歲樓)와 전륜전(轉輪展)이, 2018년에는 도총섭(都摠攝)과 제2요사채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