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비(佛碑)·불감비(佛龕碑)·상비(像碑)라고도 한다. 초기 형식은 대석부(臺石部)에 간단한 조상기(造像記)를 새긴 2세기경 인도의 광배형(光背形) 삼존석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한비(漢碑)의 형식이 불교에 채용되는 6세기 초 북위(北魏)의 석굴 사원에 그 시원적인 형식이 보인다. 즉, 외형은 비석과 같이 낮은 대석 위에 직사각형의 비신(碑身)이 수직으로 세워졌다. 그 정상에 둘 또는 네 마리 혹은 여섯 마리의 용이 뒤얽혀 조각되었다. 비신부에는 비문이 축소되거나 생략되고 대신 복잡하고 다양한 불상 조각이 나타나게 된다. 6세기 초에 조성되기 시작한 비상은 동·서위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어 수많은 조상 예를 남기고 있다.
특히 서위시대의 석불은 소형의 비상이 주류를 이루어 방주형(方柱形)의 석상 네 면에 모두 불상이 조각되는 사면불(四面佛)의 형식으로 발전했다. 6세기 말경에는 불교 관계의 비석에서도 비액(碑額 : 비석에 새기거나 쓴 글이나 글씨) 부분에 불상이 조각되는 등 비석과 비상의 개념 규정이 어려울 정도로 다양화되었다. 이러한 비상은 당비(唐碑)의 형식이 확립되는 수·당시대까지 크게 유행하지만 8세기 후반 이후 불교 조각의 쇠퇴에 따라 그 조상 예가 현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석조 비상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충청남도 연기 지방에서 발견된 7점뿐이다. 이들 비상은 연기군 비암사(碑巖寺)에서 3점, 연화사(蓮花寺)에서 2점, 공주시 정안면에서 1점 그리고 조치원 서광암(瑞光庵)에서 1점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비상과는 달리 외형이 부정형이며 옥개석과 대석을 별석으로 만들어 결구한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와 함께 재질이 모두 납질편암(蠟質片巖)이고 양식적으로도 공통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중 4점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들 비상은 통일신라 초기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조성된 지방 유파적 작품으로 밝혀졌다. 또한 명문 중의 상명(像名)이 모두 ‘아미타불(阿彌陀佛)’로 명기되어 있어 당시 활발했던 정토 신앙(淨土信仰)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상은 일반적인 불상과는 달리 도상적(圖像的)인 다양성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명문이 새겨져 있어 편년 설정의 기준작이 된다. 이를 통하여 제작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까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