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법흥왕대에 이르러 국력을 신장하여 밖으로 가야의 병합에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 마침내 532년(법흥왕 19)에 금관가야를 병탄(倂呑)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의 적극적인 진출로 가야제국의 후견세력인 백제와 왜(倭)와의 결속과 유대는 더욱 긴밀하게 되어갔다.
백제 사신의 왜에의 왕래는 매우 빈번해졌다. 일본 구주(九州)일대를 본거지로 하는 왜는 한반도내의 그들의 근거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야와 백제를 더욱 긴밀하게 결속하도록 배후에서 획책하였다. 백제는 544년(성왕 22)에도 가야와 왜의 잔존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같은 해 2월에 시덕(施德) 사나노차주와 시덕 마무(馬武) 및 시덕 고분옥(高分屋)과 함께 가야로 나갔으며 545년 5월에는 나솔(奈率)기릉(其㥄)·용기다(用奇多)와 더불어 일본에 사신으로 갔고, 또 553년 정월에는 상부(上部) 덕솔(德率)의 관위로 한솔(扞率)예새돈(禮塞敦) 등과 더불어 왜에 원군을 청하는 사절로 도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