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의자왕 20)에 백제의 수도 부여가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포위,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많은 지배층에 속하는 인사들이 당으로 끌려갔는데, 그 수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왕과 왕족 등 귀족 93인과 백성 1만2000인이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백제의 지배층에 속하는 많은 귀족과 장군 등 지식층의 인사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일본조정에서는 이들 백제의 귀족과 지식인들을 크게 우대하여 백제의 관위에 따라서 일본의 관위를 수여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백제의 편을 들었던 까닭에 나당연합군이 침입해올까 두려워 나당연합군이 진격해오는 통로에 해당하는 곳에 백제에서 건너온 장군들을 시켜서 방위용의 산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665년 8월에 백제인 달솔(達率) 답본춘초(答본春初)는 나가도국(長門國 : 현재의 山口縣)에 보내서 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동시에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와 달솔 억례복류(憶禮福留)는 지구시국(筑紫國 : 지금의 九州北部)에 보내어져 오노(大野)와 기(椽)에 축성하였다. 이때 백제인에 의해서 일본의 구주일대와 간사이지방(關西地方) 곳곳에 구축된 산성은 그뒤에 일본에서는 완전히 망각되었다.
다만 잔존하는 석축(石築)을 고고이시(神籠石)라고 부르고, 고대 제사 등 신사(神事)를 행한 유적이라고 생각되어왔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것이 백제멸망 후 나당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산성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져가고 있다.